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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30. 2020

시선과의 이별

남편은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동시에 (당연하겠지만) 시선을 잃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우리가 말 없이 눈을 마주칠 때 둘 만 알던 그 시선이 사라졌다. 귀찮은 상사에 대해 얘기할 때의 짜증스러운 눈빛도, 나에게 고마울 때의 부드러운 눈빛도, 여러 사람 속에서 ‘우리 좀 이따 나가자’ 며 비밀스레 속삭이던 눈빛도 사라졌다. 그는 나를 보기 위해 소리 나는 쪽으로 연신 고개를 돌리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와 나의 눈이 정확히 마주치는 순간은 없다. 어쩌면 그건 당연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니까. ‘보지 못한다’는 의미를 상상하기 어려웠는데(물론 눈을 억지로 감고 있을 수는 있지만) 남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다.


남편은 시선을 잃었는데, 시선을 얻기도 한다. 남편과 산책을 나서면 나는 가장 먼저 ‘시선’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미 지나친 우리를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면에서 아주 빤히 우리를 쳐다보며 지나간다. 요즘은 전염병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하다보니 그 눈빛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좁은 길에서 남편이 내 어깨를 잡고 기차처럼 지나가거나, 장애물 때문에 내가 남편의 양 팔을 잡고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할 때도 사람들은 우리를 주시한다. 그렇게 남편은 시선을 잃고, 시선을 얻었다. 그리고 시선은, 많은 말을 한다.


장영희는 자신의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잡지 인터뷰를 진행하고 며칠 뒤 받아 본 책에는 “천형의 삶을 사는, 장영희”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장영희 교수는 말한다. “왜 함부로 남의 삶을 ‘천형’이라 단정짓느냐고, 내가 내 삶을 천형이라 부르지 않는데 타인이 무슨 권리로 내 삶을 재단하느냐고” 그녀가 살던 때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그녀가 겪은 그 시선이 지금은 달라졌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


김원영은 장애인 혹은 소수자에 대한 시선의 문제를 다루며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author)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고, 나아가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남편이 자신의 시선을 잃고 나서 타인으로부터 얻게 된 시선에는 ‘공통적으로’ 그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라는 인식이 결여돼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 남편의 존엄을 침범했다. 남편에게 건네는 말투를 꼭 다섯 살 아이에게 하듯이 바꿨고, 남편의 의사를 굳이 나에게 물었다. 그가 가지게 된 새로운 정체성을 두고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했고, 때로는 자신이 남편을 ‘배려’까지 한다는 것에 도취되었다. “살아난 것이 어디냐. 그것만도 행운이라 여기며 살아라.”고 말하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한 간병사는 남편을 아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병실의 다른 사람들에게 다 들리도록 남편의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용변이나 불면증)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남편은 단지 시력을 잃었을 뿐인데 삶에서 완전히 낙오돼버린 것처럼 대하는 타인의 시선에 무던히도 찔려야 했다.


시선에는 많은 것이 담긴다. 아니, 모든 것이 담긴다. 거기에는 오히려 선뜻 말로 꺼낼 수 없는 내밀한 생각이 담기고, 행동하면 손가락질 받을까봐 차마 밀어냈던 폭력적인 마음도 담긴다. 함부로 불쌍하게 여기는 오만함이 담기고, 불편해하고 거북해하는 차별이 담긴다. 말과 행동은 속일 수 있지만, 시선까지 속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나도 반성한다. 내가 함부로 보냈던 어떤 시선에 찔리고 베었을 누군가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다. 잘 모른다는 이유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결론지었던 일들을 반성한다. 그렇게 내 시선을 하나하나 고쳐간다. 함부로 구분하지 않고, 쉽게 결론짓지 않으니 자연히 내 눈빛에 특정한 감정이 담기는 일이 줄어든다. 그래도 어렵다. 내 생각은 언제나 내 예상보다 빠르고, 그러면 어느새 내 눈빛에 그 생각이 담기고 만다. 그 동안 내 시선도 얼마나 갇혀만 있었던건가. 보려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나를 둘러싼 어떤 시선도, 실제의 나를 다 아는 건 아니다. 당연히 내가 보내는 내 시선에도 상대를 다 안다는 오만함이 담겨선 안 된다.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시선의 자유를 얻고, 또 내 시선에게도 자유를 선물한다.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으니까. 꼭 지금 보려는 그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덧. 보르헤스가 실명하게 된 후 쓴 <축복의 시> 중 일부를 싣는다. (남편은 첫 구절이 꼭 자기 심정 같다고 말한다.)


누구도 눈물을 흘리거나 비난으로 깎아내리지 말길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중략)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방문하네


(중략)


그루삭이든 보르헤스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가는 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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