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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30. 2020

혼자 있잖아요

남편의 첫인상을 선명히 기억한다. 새내기였던 당신은 날카롭고 긴 눈매를 가진, 청년보다는 아직 소년에 가까운 남자였다. 당신의 화법은 또래보다 다소 느릿하고 담백(?)했다. 밥 먹자, 차 한 잔 하자는 나의 문자에는 “네”가 전부였고, “뭐해?”라고 물으면, “있어요”라고 말했다. 아, 때론 과정을 건너 뛰어 “어디세요? 나갈께요”라고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이 좋았다. 꾸밈 없는 태도도, 사심 없는 말투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는 좀 망설였다. 서글펐던 내 삶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당신이, 그 해맑은 진심이, 나를 더 못나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보내고 내 방에 앉으면 ‘내일은 헤어질거야’라고 다짐하곤 했다. 


물론 이별은 내 마음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고 나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과 결혼했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남편과의 헤어짐의 순간은 전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남편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며칠 쯤 지났을까. 하루에 한 번, 20분 간의 면회가 전부였던 때였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당신은 손에 파리채가 덫대여진 것 같이 생긴 장갑(의식이 온전치 않은 환자들이 상처를 만지거나 주사를 뽑을 까봐 쓰는 일종의 억제대)를 낀 채로 누워 있었다. 어떤 날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바라보려 애썼는데, 이미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남편은 당시에 섬망이 심해서, 나에게 “카톡할테니 어서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하거나, “어제 아래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무서워”라고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남편을 고작 20분 간 바라보다 나오는 길.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다가 눈물이 범벅된 채로 쓰러질 듯 억지로 걸어나오는 길. 엉엉 소리내어 울 수도 없어서 속으로만 삼키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는 길. 중환자실 앞 대기 의자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누군가를 중환자실에 두고 나온 이들은 한참 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차가운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두고서 도저히 멀리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당직의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흰 종이를 가득 채운, 이 수술로 남편을 잃어도 항의하지 않겠다는 글자들. 나는 그때 오로지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남편을 혼자 둬야 한다는 것. 


내 과외 수업이 끝날 시간이면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서 간식을 사들고 기다리던 당신을, 무심코 먹고 싶다고 말한 햄버거를 사서 품 안에 넣고 나를 기다리던 하얀 눈 속의 당신을, 나 기다리느라 지루하지 않았냐고 하면 동네 마트에서 산 미니 약과를 깨물며 “마트 구경 좀 했지” 하고 씩 웃던 당신을, 이토록 애틋한 당신을 혼자 둬야 하다니. 


서류에 서명을 다 받은 의사는 나를 밖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절박했다. 수술실로 옮길 시간적 여유도 없어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를 더 애타게 했다. 당장 이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몇 분 안에 남편이 죽을 수도 있고, 수술을 한다고 해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더더욱 남편을 혼자 둘 수가 없었다.  


“선생님 아무 것도 안할께요.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께요. 저 사람 혼자 있잖아요.” 


닫히는 중환자실 문을 보며, 나는 내가 참 미웠다. 당신을 사랑할수록, 당신과 꼭 하나인 것처럼 익숙해질수록 ‘나’를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 했던 나를. 결국 당신의 아픔 한 자락도 대신해줄 수 없는데, 당신 곁에 서 있을수조차 없는데, ‘나’를 지키겠다고 당신을 밀어냈던 그 순간들을. 


그 날 나는 평소에는 인정하기 힘든 어떤 진실과 마주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흐르던 어떤 감정도, 갈등도, 사랑조차도 영원하지 않았다. 몇 분 후에 의사가 저 문을 열고 나와서 내뱉는 말로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당신과 내가 헤어짐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 관계가 당장이라도 끝나버릴 수 있다는 절박한 경험이었다. 


그러니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니기를, 나는 차마 빌 수도 없는 마음이 되었다. 




닫히는 문 뒤로 외롭게 누워 있던 당신의 모습이, 당신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 아니도록, 지금껏 내 곁에 남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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