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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8. 2020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보는 일

정세랑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속 안은영은 말하자면 ‘히어로’다. 그녀는 남들을 위해 비밀리에 위험한(?) 일들을 수행한다. 안은영이 가진 능력은 ‘젤리’를 알아볼 수 있고 퇴치할 수 있다는 것. 젤리란 사람의 감정이 남기는 부유물로 그것들이 사람을 잠식하지 않게 퇴치해줘야만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어린 은영은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다가, 그 다음에는 거부하다가, 이제는 “씨발”이라고 되뇌이면서도 남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소설속 안은영을 상상하면서(혹은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구현한 안은영을 떠올리면서) ‘히어로’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생긴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을 가운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 아이언맨이나 캡틴아메리카처럼 매끈하고 정돈된 모습은 없고, 늘 피곤한 얼굴이다. 특히 사람들을 바라볼 때의 그녀는 언제나 조금은 얼빠진 듯한 표정인데, 왜냐하면 젤리는 그녀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걸 보면서, 그걸 본다는 사실을 맘 편히 털어놓지는 못하니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꾀죄죄하고 불만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안은영이 해결해야 하는 여러 사건들, 만나야 하는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도 나는 옴잡이 혜민이를 유독 애틋하게 읽었다. 혜민이는 '옴벌레'를 삼키는 게 제 역할이다. 혜민이는 엄마도 아빠도, 출생도 없이 그저 '나타난다.' 옴벌레가 출몰해 사람들을 괴롭히면 이 아이가 나타나 그것들을 '삼킨다.' 이 아이의 위액만이 옴벌레를 완전히 소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혜민이의 소화력은 어마어마한데, 한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면 절대 빈 속에 옴벌레를 먹지 말 것. 빈 속에 먹으면 위가 쓰리거든요! 


혜민이는 자신의 담당 구역에서 수백년을 존재해왔다. 옴벌레는 때때로 창궐해서 사람들을 재수 옴 붙게 하니까. "옴 붙으면 100일 안에 떼내야 해요. 오래 두면 혼이 상합니다." 이 아이는 당연하다는듯 입 안 가득 옴벌레를 잡아 넣고 우물거린다. 스무살이 되면 사라지고, 자신의 구역(반경 5.38km)밖으로는 절대 나가서는 안 되는 삶에 순응한다. 안은영은 묻는다. "원래 그런 게 어딨어?" 혜민이는 대답한다. "원래 그런거죠 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걸 모른다.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아서 백혜민의 수명은 그대로 짧다는 얘기였다. 은영은 스무 살에 끝나 버리는 인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옴잡이가 아닌 보통 사람도 때 이른 죽음이야 종종 맞이하지만, 그걸 반복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역시 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구해 주러, 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러 오지 않는다. 그날 저녁 은영은 혜민과 패스트푸드를 먹기로 했다.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그 선한 존재를 상상하며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옴잡이의 삶을 포기하고 스무살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안은영에게 혜민이는 묻는다. "그럼 학교는요? 이 애들은 어떡해요?" 화가 치미는 안은영이었지만, 그 무해한 존재의 무해한 마음 앞에 안은영도 무릎을 꿇는다. 학교와 그 주변에 득실대는 옴벌레를 밤새도록 잡아다 주며 말한다. "이제 됐지? 학교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께." 


이쯤되면 안은영의 능력은 젤리를 보고 퇴치해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안은영이 가진 진짜 능력은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대해 “대체 왜 그런거냐”고 물어봐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원래 그런 거”라는 혜민이의 대답에 안은영은 분노한다. “너의 삶을 원래 그렇다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수백년 동안 혜민이가 스무살까지 밖에 살 수 없고 그 짧은 삶 동안 내내 옴벌레만 잡다가 소멸했어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았던 걸 보면 안은영은 보통 히어로가 아닌 셈이다.  




살다 보면 그런 이들을 만나곤 한다. 옴잡이 백혜민처럼 마치 세상에 발 딛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이는 사람들.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고 큰소리치는 논리와는 빗겨 서 있는, 무해한 사람들. 소설을 읽으며 어쩌면 그 사람들은 옴을 잡기 위해 태어나 이런 저런 얼굴로 살아가는 수많은 '혜민'이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보았다. 


그 무해한 얼굴들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게 분명한데, 그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나타나서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내밀고, 웃음을 주고,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다. 나를 기억해달라고 치대기보다는 차라리 한 마리 옴을 더 삼키려고 하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  내가 만났던 혜민이는 누구의 얼굴이었나. 설마, 벌써 혜민이를 잊은 건가.  


나는 누군가의 반복된 선의에 대해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나.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가 선의를 베풀러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으레 부담을 주지는 않았나. 혜민이는 특별한 아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선한 이들의 얼굴을 대변한다. 안은영의 말처럼 누구의 삶도 ‘원래 그런 건 없’는데, 마치 자신의 삶이 원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이제 만약 누군가의 얼굴을 한 혜민이를 만난다면 그저 고맙다고만 말하기 보다는 혜민이가 진 짐을 나눠 들어야겠다. 안은영이 혜민이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손 내밀 수 있는 서로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어벤져스도 배트맨도 필요 없을거다.  


(혜민는 안은영의 도움으로 위를 절제한 후 옴잡이로서의 삶을 끝내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 여담이지만 졸업 후에도 자주 연락해 오던 혜민이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역사가 유구한 해충퇴치방제 회사에 입사했다고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을 때 두 교사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좋은 회사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왜 또, 대체 왜 굳이. 두 사람의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며 혜민이 붉은 입술로 웃었다. (정세랑, 위의 책) 


이래서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라고들 하나보다. 혜민이를 상상하며 애틋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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