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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1. 2020

100번째, 글



100번째 글 축하 선물입니다. :)



남편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선인장도 말려죽여본 적이 있는 나지만, 왠지 남편이 살아돌아온 것이 내 덕분인 것만 같아서 생명을 기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만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내가 초록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초록색을 보면 마음이 풀어져버린다. 신혼 여행을 계획하며 숙소를 고를 때도 초록색과 연두색 쿠션만 보고 오케이를 외쳤으니 알만 하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있다면, 이건 가장 폼잡기용인데,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들 때문이다. 가령 메리 올리버는 "나무들을 본다/ 자신의 몸을/ 빛의 기둥으로/ 만들고 있는." 같은 문장을 쓰곤 하니까 왠지 식물을 좀 가까이 둬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식물들을 기르면서 가만히 그것들을 지켜보자니, 이 아이들은 참으로 고요한 존재더라. 큰 소리도 없이 움직임도 없이, 살아가는 생명체. 그런데도 새 잎을 틔우고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우는 존재. 어쩜 저렇게 고요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몬스터' 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몬스테라'의 한 종류, 오블리코아의 모습. 잎이 찢어지는 게 매력포인트!


고요하다는 건, 인간종에게는 참 어려운 상태다. 막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우리는 늘 원치 않는 뭔가를 하게 된다. 몸이 피곤해서 쉬려고 누워서도 뭔가에 대해 계속해서 후회를 한다거나, 불안함 때문에 끊임 없이 걱정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안하는 채로 고요한 줄 알았던 그 시간들 속에서도 우리는 의도치 않은 뭔가를 해왔던 것이다. 때로는 그 뭔가로부터 부유물들을 남기기도 하고. 그것이 내가 남긴 것인 줄도 모른채 말이다.


또 어떤 것들은 아주 열심히 진정으로 노력하는 것임에도 애써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들도 있다. 가령 슬픈 기억, 괴로운 마음, 아픈 과거들은 우리가 아무리 애써 노력하고 살아낸 것이어도 그것이 뭘 남겼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황급히 치워버려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것들은 분명 우리에게 뭔가를 남기고, 우리는 그 남겨진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외면하고 거부하게 된다.


나는 그 외면된 부분, 거부된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잊으려고 애쓰는 그것, 하지만 잊혀지지는 않는 그것, 그래서 우리를 자꾸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나저나 내가 식물과 좀 더 가까워진 계기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건 내가 괴로웠기 때문이다.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라는 책이 떠오른다. 참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렇지. 사람은 많은 이유로 괴로울 수 있다. 그리고 분명 괴로운 이에게 식물은 위로가 된다. 왜 괴로우냐 묻는다면, 그 괴로움들의 이유를 하나하나 낱낱이 밝혀 설명하는 일은 때로 또 다른 괴로움이 된다고만 말해두겠다. 그런 일로 괴로울 건 또 뭐냐고? 이런 일로 괴로울 줄 모른다면 그 많은 괴로움을 알고 있을리가, 없다. 대신에 식물이 어떻게 위로가 되냐고 묻는다면 약간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다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들로) 아무튼, 나는 괴로웠던 것이다. 그 날도 괴로움에 몸서리치다가 산책을 나섰다. 자주 다니는 산책길이었고 이제 막 가을로 들어선 날이었다. 바람이 불면 선선하고 해가 비치면 아직은 아니라는 듯 여름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하늘은 높아져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버릇처럼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바람이 불었고, 문득 나무를 보았다. 바람이 불자 커다란 나무는 그저 흔들렸다.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 뾰족하고 높았다. 밑둥은 여럿이서 감싸안아야 할 정도로 두꺼웠다. 그렇게 크고 튼튼한 나무가, 바람이 불자, 나무 맨 위에 자란 작은 잎 하나까지 빠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대로, 온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처음에는 나무가 흔들리는 게 슬퍼보이다가, 계속 바라보니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워보였다. 나뭇가지는 딱딱한 거 아니었나? 내가 보는 나무는 마치 물처럼 유연해보였다. 그 때 갑자기, 그냥 흔들리면 되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연이어 나는 왜 안 흔들리려고 이토록 애를 쓰나, 그런 마음이 따라왔다. 그 동안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괜찮다고, 나는 안 흔들릴 자신이 있다고 울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아파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괴로웠던 거구나. 그러고 나니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난 그 상처들 때문에 아프다. 너무나 아파서 피를 철철 흘린다. 아프지 않고 싶지만, 간절히 그러길 바라지만, 그저 바람일 뿐. 나는 아프다. 나는, 너무나, 아프다.



산책길에 만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 날 이후로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여전히 그 상처로 아프지만 아프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으니 괴롭지는 않아졌다. 이제는 상처가 떠오르면 서둘러 그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황급히 목소리를 높이기 보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능한만큼, 더 오래, 더 깊이 바라본다. 그건 상처들을 곱씹으며 평가하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저 가만히, 상처와 고통의 자리를 바라보는 거다. 나의 상처에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 온전히 바라본다. 아주 고운 것을 볼 때처럼 공들여 바라본다. 수많은 유혹에도 그렇게 한다. 누군가를 욕하고, 나를 탓하고,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고 후회하고, 도망치고, 창피해하는 그 모든 연약한 나를 받아안으며 버틴다. 그때마다 나는 흔들리는 나무를 떠올린다. 흔들리면 된다. 아프면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갑작스럽지만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막 타려다가 "왁" 하고 내 다리에 내가 걸려 넘어지던 날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의식의 흐름인가) 아예 만원이었다면 차라리 좀 나았을텐데, 열차 안은 자리는 꽉 차 있지만 서 있는 사람은 드문, 드문 있는 그래서 누구나 아주 약간만 고개를 돌리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런데 나는 너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벌떡 일어서며 "괜찮아요?" 라고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고, 덕분에 귀찮아서 나를 외면했던 사람들마저도 꾸역꾸역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때, 너무 아프지만 얼른 일어나서 내리려던 그 때, 문이 닫혔다. 나는 이미 일어났고, 문은 닫혔고, 아저씨는 자꾸만 큰 소리로 괜찮냐고 물어보고. 그때 나에게 섬광처럼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냥 아프면 된다.' 나는 절뚝거리며 아저씨가 양보해준 의자에 앉았고, 아저씨는 만족한 얼굴이 되었고, 나는 드디어 사람들에게서 빠르게 잊혀질 수 있었다. 아플 때는 그냥 아프면 된다. 언제나 원리는 간단하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슬픈 기억, 괴로운 마음, 아픈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것들이 내게 남기고 간 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건 도망치지 않고, 다시, 다시, 다시, 더 깊이 더 정확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이었다. 글로 표현한다는 건 끊임 없는 되새김질이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나?, 그 기억에 대한 이 표현이 정확한가?


그 모든 과정은 어쩌면 메리 올리버가 말한 '구원적 행위'에 가까워지려는 동작일지 모른다고, 슬며시 말해본다.


그건, 글을 안 썼으면 어쩔 뻔 했냐며 내 어깨를 툭툭 쳐주는 마음이다. 썼으니, 잘했다고 웃어주는 마음이다. 에세이와 책 리뷰를 2주간 쉬겠다고 해놓고 자꾸 컴퓨터 앞을 기웃거리며 글을 끄적거리는 마음이다.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힘든 일이 있다면, 슬픈 기억이 있다면 외면하지 마시고 부디 아파하는 스스로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실 수 있기를. 그래서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내시기를. 하지만 정 힘들 때는 누구에게라도 손 내밀고 말 걸기를. 고운 당신은 그마저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서 망설이겠지만, 제발 그만큼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걸, 아니 실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걸 기억해주길. 어쩌면 그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잊지 말기를. 불행 속에서도 행복하기를. 아니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기를. 우리가 잠깐 스쳐가거나 영영 만나지 못해도, 그저 각자 그곳에서 사라지지는 말기를.


아까운 이들을 더는 놓치고 싶지 않은데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언제나 소리없이 조용히 자신의 몫을 다하고 다시 또 소리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 한 번이라도 누구 위에 서서 요란하게 자기 목소리를 키우지 않던 사람들은 또 이렇게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네요. 당신이 내린 선택이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욕심이 많아서, 아름다운 당신의, 아름다운 생이 멈춘 것이 못내 안타깝고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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