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불안, 외로움, 중독, 관계의 어려움. 저런 아픔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도 저런 단어를 소리내어 발음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내가 그렇다'고 말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걸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더 큰 벽에 부딪히곤 하니까. 순식간에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낙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겪은 불안, 외로움,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부모와의 관계 등은 이십 여년도 더 된 일이지만 어쩐지 꼭 지금, 여기 나에게 벌어진 일들 혹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닮아있다. 이래서 '사람의 내면은 엄청나게 다르지만, 또 엄청나게 비슷하다'는 내가 만든 문장을 읽으며 자꾸 뿌듯해진다. (뭐래)
책 머리에 소개된 내용들을 보며 많은 심리적 문제들을 극복해낸 한 여성의 '극복기' '재활기'를 상상하고 '여러분 모두 힘내세요!' '그래도 삶에 희망은 있다구요!' 같은 온화하고 도덕적인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손쉬운 확신 대신에 나날의 확실한 고통들에 집중한다. 그녀의 글은 분명 '희망'을 말하고, 그녀 자신이 건너온 것들을 보여주며 '함께 건너자'고 말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저 모든 말들은 차라리 그녀가 차곡차곡 설명해 온 그녀의 고통들이 뒷받침하고 그 외로움들이 증언해줄 뿐 실제로 그녀의 입으로 외치는 말은 아니어서다.
그녀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숫기 없는 성격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거만하고 차갑고 못된 여자로 여겼던 일을 말한다. 그녀는 성큼 나아간다. 그녀는 사랑 앞에서 주눅들었던 자신을 꺼내놓고 "그것은 내 욕구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내가 그토록 깊은 수준의 친밀감과 사랑을 원하는 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성큼, 그녀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그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제대로 느끼지 않으려고 술로 도망치던 자신에 대해 말한다. 그러다 또 성큼 그녀는 "숨을 깊게 마시고 배를 홀쭉하게 당기면 갈비뼈가 낱낱이 드러났다. 그걸 확인하면 엄청나게 안심이 되었다"며 뼈와 가죽으로 이뤄진 작은 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통제하던 날들을 말한다. 그러다 또 성큼, 섭식 장애와 알코올 중독이 결국은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않기 위한 회피의 수단이며 방어기제 였다고 말한다. 그렇게 또 성큼, 자신을 더듬던 뻔뻔한 교수의 손과 입술에 대해 말하고 다시 성큼, 자신이 이 모든 감정들을 대면하게 된 순간들에 대해 말한다. 비로소 자신과 만나게 된 순간들에 대해 말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고통을 외면하거나, 고통을 마주하려고 하지만 무서워서 겉만 맴돌거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고통이 사라지길 기다리거나. 어떤 선택도 나무랄 수는 없다. 왜 그랬느냐고, 왜 더 강해지지 못했느냐고 물을 수 없다. 그건 잔인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 다른 선택도 있다. 그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도망치지 않고, 고통의 가자장자리만 더듬지 않고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어떤 얼굴의 자신과 만날지 두렵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많이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것.
그녀는 그 흔치 않은 길을 걸었다. 언뜻 그녀가 대단하고 강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실패하고, 외면하려다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 긴 실패의 기록을 함께 살펴 보자고 말한다. 인간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저 당신과 내게 주어졌던 아주 작은 우연의 차이였다고 말한다. 그러니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녀는 더듬더듬,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들어갔다. 뚜벅뚜벅이 아니라 더듬더듬. 그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목소리를 찾고 자신이 편히 앉을 곳을 발견했다. 이 고통의 기록들은 전혀 일반화되지 않은 그녀만의 기억이고, 바로 그 점에서 위로가 되었다. 고통이 단지 '질병'으로서 손쉽게 일반화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아픔' '나의 이야기'로서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그녀의 글들은 대체 '고통'을 왜 기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고 있던 나에게 든든한 한 켠이 돼 주었다.
그녀의 기록들을 읽으며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고통을 느꼈다.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괴로움을 느꼈다. 그건 나와 그녀 사이의 어떤 '공명'이었고 완전하지 않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이었다. 그녀가 느낀 어떤 절망, 어떤 나약함, 어떤 부당함은 그 자체로 내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도망쳤던 회피의 길들 역시 나도 들어서봤던, 나도 걸어봤던, 혹은 늘 서성이는 어떤 길목이었다.
내가 걸었던 회피의 길들을, 혹은 늘 서성이는 그 길목을 돌아본다. 그 길은 여전히 내 곁에,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오솔길처럼 연약한, 아직은 많이 다니지 않아 울퉁불퉁한 나에게 이르는 길이 나란히 있다.
나는 그 회피의 길을 기억하는 것만큼, 나에게로 이르는 길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울퉁불퉁한 길을 자주 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