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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24. 2020

나이면서 내가 아닌,

이슬아, <깨끗한 존경>


올해가 가기 전에 새롭게 만나보고 싶은 작가가 있었다면 그는 이슬아였다.


작가란 보통은 책을 통해 알게 되는데 그녀는 작가 자신이 먼저 인식되고 그녀의 글을 나중에 찾아보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인지 꽤 다작을 하는 편인 그녀의 책 목록을 살피며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망설여졌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안에 이미 그녀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가 생긴 후였고 그런 기대란 대부분 만족시키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글이 궁금한건가, 그녀가 궁금한건가. 둘 다이기도 했고 때로는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 엎치락 뒤치락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했다는 이 책에 마음이 내려 앉았다. 누군가를 만나는 이슬아를 만나보기로 한 것이다. 안전한 선택이었고,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보르헤스는 "우린 행복을 느낄 당시에는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뭔가를 의식한다는 사실은 불행에 기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작가 네 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글로 옮겨놓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는 저 문장과 함께 '나로부터 벗어나기'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일, 내가 가진 어떤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내 안의 편견으로부터 해방되는 일 등등. 이 책 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라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남을 선택하는 사람들, 벗어나는 중인 사람들,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보다 우선, 인터뷰를 청한 작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글쓰기는 흔히들 자아표현이라고 하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저한테 글쓰기는 자아 형성, 자아 해방, 자아 이동인 듯해요." (정혜윤의 말)


"문제는 좋은 작품이라는 게 뭔가 핵심에 다가가는 거라면, 나를 중심에 두고 각색하며 쓰는 이야기는 핵심을 피해가는 연습이 될 위험이 있다는 거죠. 핵심에 다가가는 연습이 아니라." (김한민의 말)


"처음에는 어색했대요. 제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전하거나 요구하지 않아서요. 뭘 해도 크게 관심 안 두니까 눈치 볼 필요 없고 집에 들어갔을 때 별 문제가 없으니까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대요. 그때 내가 해냈구나, 싶었어요. 이 인간성을 스스로 만들어냈구나, 하는 성취감도 들고요." (유진목의 말)


"너무 멋있는 거예요, 진짜! '저런 면모가 있구나.' 싶고요. 그 면모를 본 순간 그 전까지 봐온 다른 면모들과 정말 통합되는 것이지요. (중략)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확실히 다양해지는 중인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편협하지만요." (김원영의 말)








이건 모두 요즘의 내 고민과도 맞닿아 있음을 인정한다. 시선의 이동, 나의 확장. 다시 바라보는 일, 새롭게 바라보는 일, 나를 깨끗하게 비워보는 일 같은 것들.


나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왔다. 객관성과 주관성의 오묘한 조화, 인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메타 인지로서의 나의 공존,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사람들 앞에서의 나의 부조화, 이기적인 걸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론 이기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는 것. 그런 것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다가 글로 표현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줄곧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인가? 내가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글은 불가능할까? 보르헤스의 말대로 뭔가를 의식하느라 행복을 놓친다고 할 때, 그 의식이란 결국 '나'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지? 행복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도 싫지만, 나를 들고 전전긍긍하느라 행복의 순간조차 흘려보내고 마는 것도 싫은데. 그렇다고 '나'를 잃은 채로 여기저기 민폐나 끼치며 사는 건 더 싫다. 동시에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어쩌면 나는 두려운 건 아닌가? 나를 놓고 저 너머를 본다는 감각 자체에 대해, '나'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나를 두고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나 아닌 저 너머를 바라보는 일을 어색해하고, 낯설어했던 건 아닐까? 어려운 일이라는 건 그저 편견이고 단지, '모른다'고 인정하기 싫었던 건 아닐까.


'나를 두고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삶의 마지막까지 내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되어줄까. 그것은 내가 나를 발딛고 서는 것일 수도 있고, 깡총거리며 저 건너를 너머다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그곳으로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문을 내어 왔다 갔다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내가 나를 비워내고 그 너머로 가려는 일, 나를 확장해내려는 일, 동시에 나를 완전히 작게 만드는 일 따위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두고 가는 일이란 어쩌면 아주 간단한 동작으로도 가능한 건 아닐까. 그들의 말을 천천히 되새긴다. 내가 늘 하던 일을 멈추는 것, 내가 늘 하던 말을 멈추는 것, 내가 늘 숨쉬던 방식을 바꾸는 것, 내가 늘 말하던 방식을 바꾸는 것, 내가 늘 생각하던 방식을 바꾸는 것.


이렇게 숨쉬는 것만이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숨쉬는 순간, 나는 다른 내가 됨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이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른 내가 됨을.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담기 위해 나를 비우는 순간, 그녀는 다른 그녀가 되었고. 먹던 음식을 먹지 않는 순간, 그는 다른 그가 되었고. 혈관 속의 피처럼 자연스러운 자신의 과거에서 걸어나오는 순간, 그녀는 다른 그녀가 되었고, 휠체어에 앉은 자신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다른 그가 되었다. 당연히, 그 순간만으로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고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 순간을 이어나갔다. 때로는 그 순간들을 이어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새, 이전의 자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새로운 자신이, 혹은 새로운 '누군가'가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과거의 나를 찾아 불안해하는 건 그저 관성의 문제라는 걸. 동시에 알고 있다. 과거의 나 역시 지금의 내 안에 살아가고 있음을. 꺼내지 않을 뿐, 그것은 살아 숨쉰다. 영원히. 그러니 그들은 '난 달라졌다'고 말하지도, '달라질거야'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꾸 넘어선다. 너머를 본다. 깡총거리면서, 문을 내면서, 묵묵히.






 


그들의 책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분명 그 너머를 보았다. 그들이 넘어선 그 순간들을 읽는다. 그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그 순간들을, 읽는다. 페소아의 말처럼,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서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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