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감정 연구>
"감정과 느낌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른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한 고정불변의 절대적 감정이나 판단은 있을 수 없다. 대상에 대한 감정과 인지는 주관적이다. 대상도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나무는 상호 연결되어 나는 나무 없이는 나무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으며 나무에 대한 느낌은 늘 변한다. 우리는 흐르는 물속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물은 한번 흘러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즉 한순간도 같은 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이 변하고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변하는 세상 속에 태어난 인간의 감정 또한 변화하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것, 나에게 정말 필요한데도 거리를 두게 되는 것, 마음에 드는 날과 마음에 안 드는 날이 얽히고 설킨 채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 이건 모두 나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다. 나에게 나의 감정이란 오랫동안 나를 할퀴는 검이었다가, 괴롭히는 스토커였다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했고, 나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내 감정이 자연발생적이라는 사실과 스스로 일어나고 소멸하는 자기충족적 성격이라는 사실, 내 의식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진실과 긍정적인 감정들이 나에게 이롭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적인 감정들에 더 마음이 쓰인다는 보편성이, 다시 말해 감정이 가진 일반적인 특징들이 모두, 빠짐없이,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내 감정도 나에게 퍽 서운했을테지. 그러니 감정은 더 제멋대로 굴었을테고. 그러면 화들짝 놀란 나는 더 이성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려고 들었을거다. 그 악순환은 내 마음을 그야말로 폐허로 만들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 아무리 넓어도 어쨌든 마음일 뿐이라는 것. 좁아도 어쨌든 마음일 뿐이라는 것. 마음이 넓어 내가 이곳저곳으로 도망쳐봐도 결국 내 마음 안이라는 것. 좁아도 내가 살아갈 곳은 바로 거기, 내 마음 속.
언어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되는 형용사들을 다 가져온다고 해도 내 감정만큼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 나는 그 모순의 세계를, 좋으면서도 싫고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아프면서도 기쁘고, 화가 나면서도 든든한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래 걸려도 괜찮아, 만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돼, 그런 뜻을 가졌다. 그 후로 감정은 나와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나야 감정과 나의 '우리 우정 포에버'였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이 친구는 아주 독특하고 예민하고 또한 똑똑해서 도저히 내가 어쩌지를 못하겠는 매력쟁이다. 나는 다만 그 친구를 이해하고 그 친구와 대화하고 그 친구와 함께 가자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권택영의 <감정 연구>를 읽었다. 작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스피노자, 메를로퐁티와 앙리 베르그송, 프로이트와 윌리엄 제임스까지. '감정'과 '의식'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사상을 정리하며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감정과 가까워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나아가 감정과 의식이, 거칠게 표현해서 몸과 머리가 서로 소통하며 부드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고민을 도와줄 지원군으로 셰익스피어부터 헨리 제임스, 보르헤스의 문학들과 르네 마그리트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웨이',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의 'Shallow',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TV 예능 '미스터 트롯'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방면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다. '감정은 이성보다 먼저 존재한다. 감정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니 감정을 받아들이고 의식(이성)과 감정 사이를 조율할 것.' 다시 말해, "언제나 호기심을 가지고 나의 감정을 존중하며 사는 것, 남의 눈치를 너무 보지 말고 나의 경험을 존중하며 사는 것, 사회의 가치 기준을 의식하되 그것이 나의 감정과 다를 때는 과감히 나를 따를 것. . . . . 이것이 삶의 열정이고 이런 삶이 결국 성공한다."는 말.
우리는 흔히 "이성적으로 생각해"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마"라고 말한다. 그럴 때 감정은 마치 비이성적인 폭군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성(의식)은 어디까지나 감정 다음의 것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모든 것에 반응하고, 그 반응과 학습된 경험을 종합하는 것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거듭 반복하고 있는 윌리엄 제임스의 문장처럼, "나는 울기에 슬프다." 슬프다는 이성의 이름 붙이기는 결국 '운다'는 나의 감정과 그에 동반된 내 몸의 반응 때문에 초래된다.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어온 우리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미 뇌과학에서 밝혀진 과학적 사실임을 저자는 여러 번 강조한다. (노홍철이 무한도전에서 외친 "여러분, 웃기에 행복한 거에요! 웃으세요!"라는 말도 떠오른다. 그 광기 어린 표정도. . . 과연 "이성은 감정의 노예"인 것이다.)
"감각이나 감정을 포함하여 그동안 열등하다고 느낀 몸과 물질이 의식의 일부가 된다. 아니 그 모든 것 없이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환경과 세상 속에서 태어나고 내 의식은 세상에 대한 반응이다. 숲에 들어서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가 바라보는 자연과 나무는 내 마음의 일부다. 영혼 또는 주체는 감정, 물질, 몸을 초월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 덕에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내 의식은 세상에 대한 반응이기에 생각은 주관적일 뿐이고 언제나 대상을 향하기에 의도적이다. 이처럼 진화는 물질이나 동물성을 떼어버린 것이 아니라 의식이 몸과 물질 위에 '이층집'을 올린 것이다. 그러므로 계단 저 아래 감각의 세계는 외부의 자극에 의식보다 먼저 자동으로 반응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좋은 것이고, 의식(이성)은 성마르고 나쁜 것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이분법적이지 않다. 저자가 '감정의 모든 것'이라고 표현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상대로부터 '이상적인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와 '하나'가 되고 싶은 감정(욕망)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내가 아이가 되고 상대가 '어머니'가 되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그와 나는 '타인'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태생적 '둘'이다. 또한 상대 역시 내가 어머니가 되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본능적으로 원한다. 이런 이기적인 두 자아의 만남은 자연히 허탈함과 박탈감을 불러온다. 이 허탈함과 박탈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우울해지거나 신경증적이 되기 쉽다.
사랑에 빠져서 모든 걸 망쳐버리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앞서 설명했듯이 나의 감정이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전제에 나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나. 나아가 나의 이성 마저도 나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더 말해 무엇할까. 감정이 대변하는 것은 내가 '자의식'이라는 걸 가지기 전부터 완연히 존재하던 어떤 것, 내 무의식의 원형, 나의 기질, 나의 영혼, 나의 그림자이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항상성 유지를 위해 끊임 없이 일한다. 하지만 의식은 그 어두운 심연을 통제할 수도 다 알 수도 없기에 억압하려고 든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억압은 억압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의식(이성)은 왜 그러는 걸까. 태곳적부터 인간의 항상성 유지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감정, 감각, 느낌, 몸에 대해 왜 그토록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억압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의식 역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다. 의식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을 저장하고 그것들을 통해 가장 안전한 길을 추론해낸다. 말하자면 컴퓨터의 역할인 셈이다. 분류하고, 통제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불특정하고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화의 산물인 의식의 역할이요 숙명이다. 하지만 이 의식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오히려 감각과 의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감기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식의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도 의식도 모두 나의 생존을 위해 서로 다투는 거라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거라면 그 둘을 모두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는 어떻게 하나.
"최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날개란 의식과 감각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의식이 전부라고 믿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기 쉽고 감각이 전부라고 믿으면 몸의 노예가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에 맡긴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고착 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밝고 낙천적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마음을 자연의 변화에 맡긴다. 여행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동시에 아주 어려운 과정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나의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사랑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나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어, 다만 내가 사랑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 모습처럼 '나'를 밀어올릴 수는 있어." 그렇게, 성숙하고 안정적인 사랑이 가능해진다. 끓어오르는 감정(욕망)을 탓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반대로 폭압적이고 집착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려 들지 않고, 그 욕망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도록 내 마음에 길을 내주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은 타인의 감정에도 공감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고독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내가 느낀 대로 너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적인 존재이므로 너를 내가 느낀 방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 즉, 사랑이라는 아주 강렬한 감정 조차도 '내'가 느끼는 것이므로 상대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나의 감정은 그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의 것'이다. 나의 감정이 얼마나 대단하게 강렬하고 미치도록 황홀하더라도 그렇다. 각각의 몸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저 엄격한 타인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건 기적인 게 맞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도 나를, 마치 내가 그를 사랑했던 과정처럼 바라보고, 알아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누리고 겪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사랑할 때 '내가 상대를 선택'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내가 상대를 선택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상대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 상대가 나를 선택했음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영원히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두 존재의 관계성을 가리키는 말이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원이나 하나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언제나 '두 존재'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될 수 없음'이라는 말에도. 영원과 하나가 감정의 언어라면 두 존재와 될 수 없음은 이성의 언어일 것이고, 우리는 마치 이 단어들로 한 문장을 만들어내듯이 나의 감정과 이성을 고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감정과 조금씩 가까워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 내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나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강렬한 감정도 나를 죽이지 못했음을, 아니 오히려 나를 더 섬세하고 단단한 존재로 만들어주었음을 이제는 안다. 나는 감정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그 감정을 거부할 때, 경험하지 않으려고 할 때, 느끼지 않으려고 할 때 다친다. 그럴 때 감정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스스로를 할퀴고 이 상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의 저편으로 내쳐진다. 상처는 언제든 나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나는 아프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그 상처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다시 겪어내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 더 낫다. 내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존중한다는 건 단지 '내' 감정을 방어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사이코패스'라 부르는 도착증의 경우 하부의 감정과 상부의 인지 사이에 연결 고리가 끊기고 감정 부분이 삭제될 때 발생한다. 말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인지만 남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정과 인지 사이의 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감정의 경험이 풍부하지 못할수록 인지적으로도 메마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왜냐하면 감정은 곧 경험이고, 경험이 풍부하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느낀다는 건 "타인과 나를 연결하는 다리"다. 우리가 음악이나 그림, 문학을 통해 치유받는 것은 그것들을 통해 '느낄 수 있'고, 타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감정이나 느낌은 타인과 연결되는 다리이며, 많이 느끼고 경험했다는 것은 많은 타인을 경험했다는 의미이고, 이는 우리의 인지를 확장시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한다. 그러니 감정과 의식이 서로 조화로운 것은 얼마나 건강하고 또한 유익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끔은 내 감정과 이성이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순간들도 있다. 감정과 이성이 자웅을 겨루느라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는 상황들이 생긴다. 그럴 때 내 마음은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두려움'이나 '불안'에 잠식된다. 내 마음이 뿌연 안개로 가득해진다. 뿌연 안개 속을 달리는 자동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속도를 줄인다. 때로는 안개가 좀 걷힐 때까지 '졸음 쉼터'나 '갓길'에 차를 대고 기다린다. 우리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감정과 이성 어느 한쪽도 포기를 안 하려고 들 때, 그래서 내가 두렵고 불안할 때 나는 가능한 가장 환한 등을 켜고, 졸음 쉼터에 내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곳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안개는 걷혀 있을 것이고, 그때 다시 내 마음을 운전해 나가면 된다. 안전하게, 어디든. 나는 나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나의 의식이기도 하고, 나의 몸이면서 머리다. 그리고 언제나 그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