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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02. 2020

더럽게 예민하고 짜증나게 까탈스러운

인간은 거짓말을 아주 많이 하는 생명체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그러하다고 한다. 거짓말에 대한 훈련은 어린 아이일때부터 시작된다고. 아이가 머리 속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 들려주기 시작하면 이미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라고 한다.


그럼 사람은 누구에게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할까?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당신도?


그렇다, 바로 자기 자신.


에? 아니라고?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음. 부럽습니다. 진심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친구가 되기는 어렵겠어요. 네네.








내가 나에게 한 셀 수 없이 많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엄청난 것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아마 기록으로 남기려면 지구 몇 바퀴는 돌아야 할 만큼의 종이가 들어갈 거짓말들 중에서(헥헥) 유독 가슴 아픈 말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나는 무던한 사람이야 그렇지?" 라는 말이다.


참, 나.


무던하다고? 어디가? 어떻게?


나는 정말로 전혀 하나도 조금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무던하지 않다. NO 무던. 오히려 더럽게 예민하고 짜증나게 까탈스러운 사람이다. 어떨 때는 나도 내가 참 불편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귀찮은 스타일이다. 그건 내 모든 감각이 예민한 것, 신경이 예민한 것, 말에 예민한 것, 감정에 예민한 것, 마음이 예민한 것, 취향에 예민한 것, 습도에 예민한 것, 냄새에 예민한 것. .(이쯤하자) 등을 모두 아우르는 그야말로 예민의 블록버스터를 보는 것 같은 수준으로, 이 세상 모든 예민이 한 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는 느낌이랄까. 생리전 증후군이라도 겹치면 같이 사는 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경보를 발동한다. 진돗개 하나, 진돗개 하나, 건드리지 않으면 안 물지도 모릅니다. 뭐, 확실하지는 않아요. 물 수도 있죠. 어차피 쟤 맘이에요 쟤 맘.


이런 나를, '무던하다'는 말로 뭉뚱그렸던 이유야 또 셀 수 없이 많겠지만, 아마도 원만한 인간관계랄지, 더 사랑받기 위해서랄지 그런 문제들이었을테지. 이놈의 인정욕구. 그러니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제가 좀 예민한 지랄쟁이 입니다, 라고 떡하니 글을 올릴 수 있게 된 건 어쩌면 장족의 발전일까. 모르겠다, 이제 발전이니 자존감이니 자기를 사랑하라느니 하는 말에는 신물이 다 날 지경이다. (갑자기 왕 예민)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가끔 '나를 사랑하라'는 말 앞에서서 멀뚱멀뚱 어색한 적이 있지 않나? 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사랑하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너도 나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데, 그 자기 사랑이라는 걸 좀 해보려고 해도 당최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야 말이지! 세상 다정하고 온화한 말투로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신을 용서하세요." 라고 말해놓고 할 일 다했다는 표정을 지으면 어쩌라는 건지. 이 책을 덮는 순간부터 뭘 어떻게 실천하면 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거 아니에요? 네?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법이니까, 이미 자기 사랑의 어떠한 경지에 오르신 분들에게는 하찮은 일이 돼버린 자기 사랑의 방법을 내가 애타게 찾는 수밖에는 없겠지. 나를 대상으로 일종의 실험을 진행한다. 나에게 뭘 어떻게 해야 내가 기분이 좋은지, 내가 나를 좀 아껴주는 것 같은지, 조건과 변수를 통제해가며(이거 맞는 단어인가?) 실험은 착착 진행되고, 운 좋게 몇 가지 방법이 목록에 오른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이토록 예민하고 까탈스러울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심 즐길 수 있는 마음이다. 내가 받아줘야 할 별스러운 취향이 또 있었구나, 하고 나를 알아가는 것. 기가막힐 정도로 빠르게 좋고 싫음을 판별해낼 때는 이런 나를 무던하다는 말 뒤에 숨기기 위해 애썼던 지난 시간을 미안해해주고, 원하는 간식을 먹인다. 이토록 급변하는 마음을 그저 알아봐준다. 내 변덕스러움에 나 자신은 우선 무장해제 돼 준다.  


이 모든 자기 희생적인(?) 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은,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바랐던 것 역시, 딱 이 정도의 존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건 자기 사랑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그저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는 것. (그런데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만큼 사랑에 가까운 일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고)



그건 마치 이런 기분이다. 아주아주 변덕스러운 친구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친구랑 절교하거나 헤어질 수는 없다. 다른 집을 구할 수도 없다. 그럼 이 친구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을테지. 싫다고 울고불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자물쇠를 채우고 때로는 그 친구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실컷 돌아다니다가도 결국에는 그 친구와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거다. 딱 그 정도의 느낌. 내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기분.


나는 그저 나를 좀 알아줬으면 했던 거다. 누구에게 귀찮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를 그저 받아주는 나, 든든한 나, 그런 나 하나면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충족되는 감정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무던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정색)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거에요. (단호) 룸메이트야 너도 알아둬. (찡긋)







아마 이쯤되면 당신도 눈치챘겠지.


더럽게 예민하고 짜증나게 까탈스러운 건, 어쩌면 인간종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산다는 학자들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아무리 성숙한 인간도 어떤 면에서는 미숙하고 필요 이상으로 변덕스러우니까.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가 그런 모습을 원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조금씩 특별한 존재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라. 예민하고 까탈스럽지 않은 주인공은 인기가 별로 없다. (그러니 어떤 특별한 룸메이트가 나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기대하지 말자. 그런 룸메이트, 없다)


또한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 예민하거나 까탈스러운 게 꼭 나쁜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너와 내가 다르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나'라는 걸 매순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아, 본인은 정말로 무던하시다구요? 제가 허락도 없이 '우리'라고 칭해서 죄송합니다. 역시 저희는 친구가 되기는 좀 어렵. .)


예민하거나 무던한 성격 사이에 우열을 가리려는 마음은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내면에는 어느 정도의 예민함이, 또 어느 정도의 무던함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서는 예민하게도 무던하게도 반응하게 되니까.


다만 얼마나 자주, 낯선 사람 앞에서는 무던하게 굴다가도 내가 신뢰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맘껏 예민해졌는지에 대해, 혹은 그 반대에 대해, 또한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특정한 마음이나 성향을 감춰왔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번,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마음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더럽게 예민하고 짜증나게 까탈스러운 너를 이해한다고. 어디가서 그렇게 살면 욕먹고 미움 받을 게 뻔하니까 내가 잘 챙겨주겠노라고. 그래도 좀, 적당히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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