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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09. 2020

내 감정과 만나는 날

태어난 이래 끊임없이 닥쳐오는 시련들을 그대로 견뎌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와 내 삶을 떨어뜨려 생각하고, 나와 내 삶에 일어나는 불행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일도 힘에 부치는 날들이 있었다.


이쯤되면 쉽게 판단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거봐라, 그런 환경에서 너가 멀쩡할리가 있느냐.’ 하는 교묘한 비난을 할 게 뻔하다. 내가 무슨 소리냐 물으면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라고 둘러대기에도 적절한 그런 말들이 들려오는 듯하다. 뭐, 그러라지. 그들은 어찌됐든 자신보다 내가 못나고 불행하길 바란다.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의 행복이나 안위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렴 상관 없다.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만약 나나 당신이 그런 말에 마음이 다친다면, 혹은 그런 말들이 이미 내면화 되어 스스로에게 비아냥 거리고 있다면 우선 그 시선부터 떼어내자.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나를 정말 괴롭힌 것은, 내가 괴로운데 대체 뭐가 왜 괴로운지 나 자신과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장 어려운 건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언제든 버텨주는 내가, 나는 정말 믿음직스러웠다. 뭐든 잘 감내하는 내가 나는 든든했다. 그래서 내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대신 내 감정보다 갈급해보이는 일에 집중하곤 했다. 그런 일은 차고 넘쳤으니까.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내고 어느새 스무 살, 어른이 된다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에게 찾아온 감정들은 절대 나쁜 신호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처음 겪는 일 앞에서 자꾸 머뭇거렸다. 내가 얼마나 사소한 사람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인지, 이렇게 평범하고 다양한, 변덕스럽기까지한 감정들은 곧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해본 적이 없던 나는 불안했다. '내가 미쳤나? 내 감정 이거 왜 이러지?'


나는 불면증을 겪었고, 수없이 많은 밤을 책과 함께 지새면서도 나 자신과 친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 밖에서 답을 찾으려는 잘못된 습관들 때문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덮어놓으려고 했다. 내 감정을 덮어놓기 위한 수많은 방패를 찾아냈다. 사실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알 수 없는 위기감, 불안함이 등장했다! 모든 신경을 총동원해서 그 문제보다 강해지자!” 나는 내 안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선택했고, 보듬기보다는 강해지기를 선택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그 많은 불행들처럼, 내가 버텨주면, 내가 강해지면 나도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감정을 돌보는 일은 외부적인 불행에 대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내가 버틴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내 감정에게는 명백한 '강요'였고, 내가 강해지자 마음 먹는 그 순간이 내 감정에게는 '폭력'이었다. 나는 그렇게 덜컹거리며 내 감정과의 만남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내 감정과 만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가 궁금해졌다. 잘 버티는 나, 잘 웃는 나, 이해하는 나, 참는 나말고 내가 모르는 나는 없나? 괴로워하는 나, 슬퍼하는 나, 질투하는 나, 박탈감을 느끼는 나는 정말 없나? 그렇게 궁금해했는데도 내 감정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자꾸 도망치고 싶어졌다. 내가 이전까지 '약한 감정들' 혹은 '부정적인 감정들'이라고 꼬리표를 붙여두었던 감정들을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고작 그런 감정들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나는 강하지 않다는 걸, 그저 모든 감정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이라는 걸,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많은 순간 두려워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아무리 머리로 이해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걸 받아들이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나를 거부하고 있는 셈이었다.


감정도 습관 같은 거라서 우리가 자주 느끼고 사용하는 감정은 더 자연스러워지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는 감정은 움츠러들고 음지에 숨는다. 괴로워하는 게 습관인 사람은 그 감정이 태도가 돼 버리듯이, 나 역시도 씩씩하고 행복한 나라는 고정된 자기 관념이 습관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나를 억제하는 일, 나를 통제하는 일에만 능숙했다. 임경선은 그녀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남과 문제를 일으키느니 나와 문제를 일으키는 걸 선택"했다고, "남과 껄끄러워질 수 있는 상황을 내 능력(나를 희생시키는 능력)으로 해결하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쉬웠다"고. 나 역시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걸 알아채는 데만도 수 년이 걸렸다. 내가 나에게 어떤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 언제든지 내가 나를 희생시키는 일에 능숙하다는 것. 이런 상황을 오래 유지해온 사람은 자신이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은 거부한다. 그 방식은 다양하고 교묘하다. 때로는 그런 감정들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걸 안다는 이유로 그 감정을 잘 겪어냈다고 스스로에게 축하까지 건넨다. 그러고 나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잘 참는 나, 긍정적이고 밝은 나.


내가 왜 나의 감정에 베이는지, 내 감정에 끌려다니느라 하루 종일 우울한지. 그러면서도 끝끝내 내 감정을 외면하는지. 무엇보다 남의 행복을 신경 쓰느라 나 혼자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나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나니 처음에는 부끄러움이 일었다. 아주 고약한 사람이나 내뱉을 만한 말들("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네" "너가 이러는 거 별로라는 건 너도 알지?")이 내 귓전에 맴돌았다. 나는 동시에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감추고 통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을 저런 말들과 함께 지냈다는 걸. 내가 나와 문제를 일으켜도 언제든 나는 나를 이기기 위해, 다시 말해 내 감정을 희생시키기 위해 나는 나에게 무서운 검열관이 되어 있었다.


저런 말들까지 알아채고 나니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오로지 나는 나와 만나고 싶었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먼저 괜찮아지고 싶었다. 내 감정에 베이지 않고, 내 감정에 끌려다니지도 않고, 내 감정을 외면하지도 않은 채 살고 싶었다. 그저 내가 나인 채로 살고 싶었다. 내가 맺는 인간관계와 내가 하는 일들로부터,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행복해야 하는 사람"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건 거의 투쟁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코 쉽지 않았다. (임경선, <엄마와 연애할 때>, 마음산책)






사람의 감정은 정말 다채롭다. 우리가 쉽게 ‘화’가 난다고 말하는 감정만 보더라도, 그 안에는 서운함, 어이 없음, 불쾌함, 무시당한 것 같은 당혹감처럼 다양한 감정들이 혼재돼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감정들은 모두 각각의 당위성을 갖는다. 그 다양한 감정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공간이 곧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불편하면 감정들이 쉽게 꺾인다. 왜곡된다. 맘껏 꽃피우지 못한다. 그러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킨다. 내 감정이지만 내 감정을 거스른다. 반대로 내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그것들이 교차되면 내 마음은 알아서 답을 내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고르게 보듬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마음 챙김'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말들 보다도 내가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말들도 때로는 어떤 정답을 나에게 강요한다고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이 편안한 상태, 유연하고 부드러운 상태를 기억한다. 그건 마치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환해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아주 적절한 온도와 습도처럼 느껴지는 감각이기도 하다. 나는 그 감각을 알고 있다. 나에게 '맞춤'하다. 꼭 내 것처럼 편안하다. 그건 모두에게 각기 다른 감각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물어본다. 내가 아는 그 편안하고 유연한 상태가 아니라면, 이유가 뭔지 묻는다. 판단하지 않고 듣는다. 오래 걸려도 기다린다. 그건 편안하고 유연해야 한다는 강요와는 다르다. 내가 지금 불편하지는 않은지 알아봐주는 것이다. 괜찮은지 살펴보는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평온한 나날에도 자주 그렇게 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가장 솔직한 나의 감정에 늘 마음을 열어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걸 놓치면, 후회하는 일이 많아진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마음은 정말 신비롭다. 마음이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일거라는 건 편견이다. 마음은 나의 이성보다도 훨씬 과학적이다. 그것을 잘 들여다볼 줄만 안다면.


마음을 만나게 되자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세상 누구도 나를 몰라주는  같아 외로워도, 엄밀히 말하면 ‘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 저 문장을 내 마음 깊숙이 이해하게 된 날, 나는 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 날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애비, 당신은 지금 잘하고 있어요. 바로 이게 잘하는 거예요.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것,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감정 때문에 죽을 리는 없다는 걸 깨닫는 것." 애비는 끄덕였다. 그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번에는 고통의 기색이 덜했다. 애비는 낫고 있었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바다출판사)


이렇게 차근차근, 어쩌면 끈질기게 나의 감정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날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오히려 이 괴로운 시간을 거치며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내 감정을 보듬고 챙겨주지 못할 때도 내가 모르는 ‘내’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셈이다. 어떤 불편함과 괴로움은 되려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한 내 영혼의 안간힘일 수도 있음을 배웠다. 당신의 영혼은 지금 뭐라고 말하는가.


매일 아침 생각한다. 그건 행복하자는 것도 건강하자는 것도 대단한 목표를 이루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치의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감각들을 외면하지도 그것들에 매몰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가자는 것. 나로, 살아가자는 것. 바로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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