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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r 03. 2022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그러니까 그게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남편과 나는 5년 동안의 연애 후에 결혼했고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결혼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았을 때다. 우리 둘 다 출근을 하던 때였고, 주말이면 밀린 집안일을 했었다. 집안일에 대해서도 누가 뭘 하자거나 집안일의 종류에 따른 호불호를 살펴 업무 분장을 하지 않고, 그저 그때그때의 서로의 컨디션에 따라 자유롭게 해오던 중이었다. 그날 남편은 한껏 기분 좋은 목소리로 "내가 뭐 더 도와줄 일 없어?"라고 물었는데, 그 말속에 담긴 '나 좀 봐라, 나 정말 너를 잘 도와주고 있지!'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과 정 힘든 게 있으면 나한테 부탁해도 된다는 듯한 자신감이 더해진 목소리에 나는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그래, 오늘 당신 나와 얘기를 좀 해야겠구나.' 하는 결심에 이르렀다.


대화라 쓰고 나의 일장 연설이라 읽을 그 날 그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이 작은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100%, 나 아니면 남편이 벌인 일일 터.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건지?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 속에서 왜 집안일은 '내 일'이고 본인은 내 일을 '도와주는' 선량한 사람이라 여기는 건지? 가뜩이나 집안일 시냅스가 전혀 없이 해맑기만 한 남편을 볼 때마다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남편이 자취를 오래 하긴 했어도 '살림'이랄 게 없이 지내는 생활이었음) 이제 심지어 '내가 너 도와줬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건지? 나는 그날,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키려면 절대 화내지 말고, 미숙하더라도 무조건 칭찬해주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어느 결혼 선배들의 이야기를 모두 버렸다. 집안일을 '시켜야만' 한다는 전제부터 틀렸다.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아니지 않나.


남편은 그 이야기들을 아주 신중하고 놀라운 얼굴로 들었다. 쉽게 어떤 말을 해서 오해를 사지도 않았다. 서둘러 잘못했다는 말을 하며 상황을 넘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차분히 들었고, 오래 곱씹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로 우리는 이 문제로 다투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는 '내가 너를 도와준다'는 느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집안일 시냅스가 한 번에 장착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내가 말한 핵심적인 부분, 그러니까, '우리 둘이 만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누구 한 명의 책임이 아니'라는 데에 관해서는 충분히 받아들이고 동의한 거라고 보인다. 그는 집에서도 능동적으로 되었다. 이 집에 자신처럼 휴식과 자유가 있어야 하는 또 한 명의 개체가 살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나아가, 내가 더 잘하고 좋아하는 일들 - 가령 요리나 설거지 - 을 할 때도 자주 고마움을 표현했다. 너는 네 할 일 하는구나, 라는 태도는 사라졌다. 물론 나 역시, 그를 요령껏 '조련'하고 '가르치기 위해' 칭찬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고민해줘서 고맙다고, 실천해줘서 고맙다고.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속이지 않는다. 완전히 투명해진 느낌이다. 우리 사이에는 집안일도 권력 관계도 끼어들 틈이 없다. 만약 내가, '먼저 결혼'한 선배들의 권위에 의지했다면, 사회적 통념에 항복했다면, 순간의 자존심이나 순간의 불편함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투명해지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안다.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 다사 단란한 부부의 생활이 모두 정리되고 평화로워지지는 않는다. 서로 다르게 생긴 톱니바퀴의 이가 맞아 돌아가려면 우리는 부단히 부딪히고 자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한 번의 경험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우리 각자가 최선의 길을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다는 확신,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믿는다는 뱃심, 같은 것들 말이다. 그건 비단 '부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어서, 서로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이 결국 각자에게 얼마나 귀한 경험이 되는지 매번 배워가는 중이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제인 에어'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이냐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그녀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다.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자신을 해칠 만한 선택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익이 아니라 진실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라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이 선택은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당신의 결점이 싫은 게 아니라고. 그녀의 "아니"는 모든 부정을 뒤엎고 끝내 가장 크고 넓은 긍정으로 연결된다. 그녀의 부정은 나아가기 위한 부정, 새로워지기 위한 부정, 일어서기 위한 부정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놀라운 선택들은 이 책이 나온 지 173년이 지난 지금도 뭉근한 감동과 아픔을 전한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리드 부인과 그의 자식들(그러니까 그녀의 외숙모와 사촌들)에게 차별과 학대를 당할 때 제인 에어는 굴하지 않고, "뭔가를 말해야만 했다. 심하게 짓밟혔기 때문에 반격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적에게 복수할 힘이 내게 있을까?"라고 말한다. 로우드에서 선생님들의 부당한 처사에 반대하며, "잔인하고 부당한 사람들에게도 늘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한다면 사악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굴 거야. 그런 사람들은 무서워하지도 않고 따라서 변하지도 않고 점점 더 사악해질 거야."라고 말한다. 손필드 저택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향해 "나는 곧 잉그램 양이 (속된 표현으로 하면) 덴트 부인을, 그녀의 무식함을 놀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 식으로 놀리는 것이 영리해 보일지 모르지만 단연코 착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방법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저항이었을 것이다. '반대'하는 것이다. 그때 그녀의 저항은 '살아 있음'과도 연결된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신이 죽을 것처럼 불안해한다. 그 사악함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반대'의 이면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사납게 대드는 것 말고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음울한 분노처럼 사악한 감정이 아니라 착한 감정에서 나오는 양분을 얻고 싶었다"고. 그럴 때 그녀의 저항은, 그녀의 반대는 어떤 가능성의 문 앞에 선다. "아니"라고 말한 그다음, 그 후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부터는 어떤 부당한 일을 겪을 때, 잔인한 말이나 행동을 겪을 때, 제인 에어를 떠올리면 좋겠다. 나는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긍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걸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는 용서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부당함과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이, 그것에 저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저항 후에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인간적인 불편함과 괴로움, 평소보다 격앙된 감정, 누군가를 (이유가 있다고 해도) 미워했다는 자괴감, 내가 한 말이나 행동으로 (분명히) 누군가가 불편해졌을 거라는 사실과 그로 인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일련의 상황과 행위들을 재평가하려는 내면의 작은 심판자까지. 나는 이제 부당함과 잔인함에 맞서는 일뿐만 아니라, 그 후에 어떻게 다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 경험을 통해 미묘하게 달라진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 부당하고 잔인한 일의 존재와 착한 감정이 얼마든지, 또 반드시 양립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저항하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한 후에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얼마나 힘들지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마련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에게 '아니'라는 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의 '아니' 속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 너는 나쁘고 나는 착하다는 이분법, 대안 없는 빈정거림이 아니라, 늘 그다음이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외친 후에도 삶은 이어져야 하니까, 적어도 내가 아니라고 외치기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하니까. 그녀의 아니라는 말은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아니'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로체스터를 만난 이후부터일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시험하려 드는 로체스터를 향해 그녀는 선언하듯 말한다. "제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고, 작고, 못생겼지만 그렇다고 영혼도 감정도 없는 줄 아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처럼 영혼이 있고, 당신처럼 감정이 풍부해요! (중략)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 또는 육체를 통해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당신 영혼에 말하는 거예요.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무덤을 지나 하느님 발치에 서서 평등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물론 지금도 평등하지만요." 이 유명한 대목에서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랑 앞에서 불평등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적어도 사랑 앞에서라면 우리는 떳떳하고 당당하고 싶어진다. 사랑 앞에서라면 계급장 다 떼고 평등해져야 한다. 그녀는 그 인간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로체스터가 자꾸만 '천사'가 돼 달라고 요구하고, 나아가 '당신은 나의 천사'라고 부르자, 제인 에어는 다시금 그 '아니'라는 팻말을 꺼내 드는 것이다. ""전 천사가 아니에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천사가 안 될 거예요. 저 자신이 될 거예요. 로체스터 씨, 저를 억지로 천사로 만들지도 마시고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마세요. 제가 당신을 천사로 만들 수 없는 것만큼이나 당신도 저를 천사로 만들 수 없어요. 저는 당신께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아요.""


그렇지!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천사가 아니라, "저 자신이 될 거"라는 그녀를 읽는다. 그녀가 이토록 여러 번, 끊임없이, 중요한 순간마다 '아니'라고 외치는 이유는 바로 저거다. 자신이 되기 위해.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거드름을 피우고 싶거나, 잘난 척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되기 위해. 그래서 그녀의 '아니'는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녀가 내뱉는 '아니'라는 말은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상대에게 닿지만, 언제나 그녀 자신에게도 닿는다. 아니, 그녀 자신에게 닿아야 한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시작한다. 새롭게 고민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그 순간을 변곡점으로 삼는다.


그러니 제인 에어가 세인트 (으로 상징되는 '종교적인 권위')에게 '아니'라고 말할 , 그러고 나서 자신이 원하는 운명의 사랑(불구가  로체스터)에게로 향할 , 나는 '아니'라는 말이 이끄는 가장 능동적인 그녀의 눈부신 비상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독자여, 나는 그와 결혼했다. (중략) 우리는  함께 있다. 함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고독 속에 있는 것만큼이나 즐겁다. 우리는 하루 종일 말하는  같다.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활기차고 귀에 들리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어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실패한 여자'일 수 있겠으나, 그녀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성공한' 삶을 살 게 되었다. 그녀는 어떤 강력한 권위나 조건, 혜택이나 편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것에 '아니'라고 외치면서, 누군가에게는 약점이고 결점이며, 불편하고 열악한 삶 속으로 뛰어든다. 기꺼이. 나는 이 작고 가진 것 없는 여성이 가장 큰 사람이 되고 많은 것을 얻는 이 삶의 여정을 사랑하게 되었다. 조금 더 많이 '아니'라고 외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쑥스럽지만, 우리 부부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제는 남편의 몸이 불편해져서(그렇다, 마치 로체스터처럼 앞이 안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남편은 그저 그이고, 나도 그저 나이다. 우리도 안다), 할 수 있는 집안일의 범위라는 게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이런 부분에 관해서라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다. 남편이 다치기 전과 표면적으로 비교하자면 내가 해야 하는 집안일의 비율은 거의 99%에 수렴하지만, 아무렴 어때, 나는 불만이 없다. 그는 '관심이 없고' '게을러서' 하지 않는 게 아니니까. 그는 그가 할 수 있고 가능할 때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그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나는 기꺼이 돕고 있고, 물론 그건 단지 그가 다시 예전처럼 집안일을 분담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그가 전처럼 이 집안에서 자유롭고 편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책임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괜찮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만큼 해야 할 일을 다 할 때, 그러니까 책임 또한 다할 때, 우리는 얼마나 든든한 자신감을 가지는가. 하지만 그는 지금 자유롭지도, 책임을 다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자주 무용해진 기분이라 서글퍼 한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맙다. 우리가 꾸린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 삶에서 끝내 원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귀하다. 그의 삶에도 비로소 '생활'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애틋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날, 그에게 '아니'라고 말하기를 잘했다고.


이제 우리 부부가 맞닥뜨리게 될 세상은, 남편이 아프기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당사자에게는 퍽 까다로운 일이고, 우선 내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 앞에서 아직 초보이지만, 지금까지 서로가 동의한 한 가지 대원칙은 있다. 어떤 상황도 '누가 그러던데' '다들 그렇게 하니까' 같은 말로 손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것.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같은 말이나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같은 말은 더더욱 듣지조차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건 우리와는 아주 먼 얘기라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여기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순간마다 '제인 에어'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 그리고 그 후를 살았던 사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걸어가기 위해서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의 발자취를 오래 기억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말하는 게 무서워질 때마다, 아니라고 말하지 못해서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펼쳐봐야지. 생각해야지. '여기가 시작'이라고. 이제부터 다시, 걸어가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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