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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r 10. 2022

모든 게 지나간 자리,

최은영, <밝은 밤>



"사람이 무서우면서도 사람의 따뜻함이 그리워서 작은 돌멩이를 든 채 동무야, 동무야, 부르는 어린 삼천이의 모습이 내 눈에 선했다. 추운 겨울날 댓돌에 앉아서 삼천이가 준 삶은 고구마를 허겁지겁 먹는 열여덟 살 새비가 나타났을 때 나는 삼천이의 눈으로 새비를 바라봤다."

-작가의 말 중.



내가 아직 국민학생이던 시절(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그 친구와 가까워졌다. 우리는 함께 놀았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놀았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그다음에는 학교가 끝나고도 놀았다. 학교 앞에서 100원짜리 쫀드기와 (운이 좋은 어떤 날에는) 300원짜리 컵떡볶이를 사 먹으면서 놀았다. 그다음에는 저녁이 되도록 놀았다. 하루는 내가 친구네 집으로, 또 다른 하루는 친구가 우리 집으로 왔다. 그다음에는 주말에도 놀았다. 엄마에게 졸라서(엄마는 아이들끼리 목욕을 하고 오면 때를 덜 벗기고 온다고 꼭 엄마와 같이 가야 한다고 했었으니까) 친구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우리는 발가벗고 놀았다. 손가락이 퉁퉁 불어서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탈의실 평상에 누워서 젖은 머리가 다 마를 때까지 놀았다.


나는 그 친구가 좋았다. 어른들 말로 하자면 우리는 유머 코드가 비슷했고(좋아하는 놀이가 같았다), 세계관이 같았고(싫어하는 친구가 같았다), 형편이 비슷했고(오늘은 간식 사 먹을 돈이 없다는 말을 서로에게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둘만 있으면 된다'고 느꼈다. 둘이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도 다른 조건도 필요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지우개를 하나 사면 친구도 지우개를 하나 샀고, 각자의 지우개가 지겨워지면 서로 바꿔서 썼다. 가족들이 어떨 때 마음이 안 드는지, 선생님은 어떤 면이 별로인지, 어른이 되면 뭘 제일 먼저 해보고 싶은지. 우리는 '비밀이 없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만큼 비밀이 없었다. 비밀일 필요가, 없었다. 네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 너는 나인데.


우리 곁에는 물론 다른 친구들도 있었고 우리는 그 친구들과도 제법 잘 어울렸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둘이 함께였다. 되돌아가야 할 종착지처럼, 우리는 서로의 곁으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까말야, 걔 좀 이상하게 굴더라? 그치그치, 나도 느꼈어, 왜 오바야 진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우리의 진짜 하루가 끝나곤 했다. 가끔은 오래 사귄 연인처럼, 서로의 새로운 친구를 질투하기도 했고,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그때뿐이었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해했다.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소설 속 삼천이와 새비의 우정을 따라가며 소중한 사람 한 명쯤 떠올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삼천이는 새비를 통해 새비는 삼천이를 통해 살아났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냈다. 소설가 오정희는 이 소설의 추천사에서 "함께 한세상을 살아냈던 두 여성의 만남은 우정, 자매애, 사랑이라는 언어를 넘어선 근원성, 어쩌면 목숨과 목숨의 얽힘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나 역시 이 소설을 놓을 수 없어 하룻밤 동안에 다 읽어버리고서는 이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기까지, 대체 내 안에 남은 이 감정이 무엇일까, 오래 들여다봐야 했다.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 그리고 급속도로 진행된 현대화 속에서 삼천이와 새비로 영옥이와 미선이로 다시 지연으로 이어지며 그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삶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읽기에 따라서는 질곡의 역사를 품은 개인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이고, 여성의 삶에 드리운 억압과 차별, 고통의 흔적을 드러내는 이야기이고, 어머니와 딸의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은 모든 게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 역사도 사람도 흐른다. 시간은 마치 급류처럼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휘감으며 제 갈 길을 가고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바쁘게 변한다. 그리고 이 변화 위에 서고자 하는 인간들은 '시대'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인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시대 때문에 휩쓸린다. 금세 불어나는 계곡물에 갇히듯, 그러다 끝내는 그 계곡물에 쓸려 내려가듯, 시대 위에 군림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그 거센 물결 앞에 나약하다.


시대라는 이름의 폭풍이 한차례 몰아친 뒤, 아주 많은 것들이 그 폭풍의 격랑에 휩싸여 제 갈 곳을 잃고 방황하거나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제야 알게 된다. 시대라는 이름 안에는 인간이나 일상, 밥벌이나 꿈 같은 것들은 없었다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외치는 큰 소리만 메아리칠 뿐, 눈 닿는 곳은 모두 폐허다. 소설은 그런 폐허 위에 남은 것들은 뭐였을지, 사람들은 그 폐허 속에서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왔을지 보여준다.


거기 삼천이가, 새비가, 명옥과 영옥이 있었다. 그 뒤에는 미선이가, 지금은 지연이가 있다. 그렇다. 폐허가 된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사람들이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하루 치의 밥벌이를 하고, 죽어가는 이를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아픈 이를 위해 잠을 쪼개고, 외로운 이를 위해 이부자리를 까는 사람들. 그들은 시대도 모르고, 시대 위에 올라서는 건 더더욱 모르지만, 시대를 '살아내는' 데는 전문가인 사람들이다. 뭔가를 이겨 먹는 데는 젬병이지만, 뭔가와 함께 하는 것, 뭔가를 살려내는 데는 전문가인 사람들이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지금까지 이름 없이 살아왔을 그 많은 '살리기 전문가'들의 이름을 듣고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그들이 자신 뒤에 남기고자 한 것들에 대해 듣는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뭔가를 살려내고 함께할 수 있었는지, 그들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는다. 이 이야기를 모두 읽은 후에 내 안에 분명히 남아 있지만,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이 그들을 통해 지금 나에게도 전해졌다고 느낀다.


그건 백정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삼천이를 향해 처음으로 조건 없는 말간 웃음을 짓던 새비의 마음 같은 것, 삼천이와 새비 아저씨가 서로에게 건네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칭찬' 같은 것, 쉬는 법 없이 바삐 돌아가던 명옥 할머니의 미싱 소리 같은 것, 무뚝뚝한 명옥 할머니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아서 겁내지도 않고 그 옆에 앉아 할머니에게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주던 영옥이의 마음 같은 것, 자신은 아직 채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를 자기 딸에게는 만나게 해주고 싶은 미선이의 마음 같은 것, 그리고, 이 모든 엄마의 엄마들의 엄마들을 - 끝내 다시 이야기되어 기억할 수 있도록 -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열기로 한 지연이의 마음 같은 것이다.


"삼천아, 잘 먹고 잘 자고 있지."

"삼천아, 항상 건강해야 한다. 우리, 삼천이."

"언니, 건강히 잘 지내."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언니, 건강히 잘 있어."

"지연씨, 고마워요."

.

.

.

그들이 서로에게 보냈던 편지의 말미에 적힌 저 쉬운 말들이, 그저 건강히 지내라고, 잘 먹고 잘 자라고, 잘 있어 달라고, 고맙다고. 그 간단한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잊힌 것들인지. 아니면 얼마나 당연해서 하찮아진 것들인지. 하지만 그런데도 제대로 해내지는 못하는 것들인지 생각한다. 폐허 위에서 서로를 살렸던 말은, 다시 살게 하고 다시 꿈꾸게 했던 말은 그저 저 쉬운 말들이었다. 그거면 충분했고, 그거면 됐다. 그들은 그 말을 나누며 그 말에 기대며 끝내 살아내고, 살아내고, 살아냈다. 죽음을 살아내고, 죽은 후를 살아내며,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희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이별했다. 친구의 집이 가세가 (더) 기울면서 도저히 서울에서는 지낼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친구는 어린 우리가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지명의 작은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친구는 그곳이 어떨지 무섭다고 했다. 가기 싫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무서움이 걱정되기보다는 친구와 헤어지는 게 더 싫은 나 자신이 어쩐지 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친구의 무서움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 두려움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더 미워졌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우리에게는 집 전화와 편지밖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그건 우리가 금세 멀어지고 말 거란 뜻이기도 했다. 너무나, 지나치게 연결되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단절.


친구는 이사하고 집 전화가 생기면 꼭 전화하겠다고 했고, 정말로 한참이 지난 뒤에 전화했다. 우리는(어쩌면 나는) 정말 반가웠다. 친구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작게 들렸고, 친구는 자주 쓸쓸한 웃음 소리를 냈다. 주소나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해도 웃기만 했다. 다음에 또 전화하겠다고 겨우 말하고는 여러 번 "잘 지내"라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괜찮냐 물었지만, 친구는 또 웃기만 했다. 끊고 싶지 않은 그 전화를 억지로 끊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시는 친구에게 전화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정말로 친구는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내 첫 우정이 실패했다고, 그러니까 내가 실패한 거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가장 좋아한 친구를 나는 단 한 번의 위기로 그대로 놓친 것이다. 그게 늘 좀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그럴까, 나는 왜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 친구를 그냥 보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그런 똑똑한 '이해'가 내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나는 그 친구를 놓쳤고, 이제 그 친구는 몇 장의 사진과 내 기억 속의 이름으로만 남았으니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 책을 리뷰하면서 내 안의 뭔가가 조금 바뀌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어쩌면 그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만나지 못한대도, 그녀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녀가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라고, 이렇게 기회가 될 때마다 그녀를 추억한다. 내 우정이 보통의 우정들 - 자주 연락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서로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주고받는 - 과는 좀 다르지만, 어쩌면 그녀도 나를 생각하며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녀와의 우정은 내 삶의 폐허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많은 폐허 속에서도 나를 살게 한 기억이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 우리를 헤어지게 한 것이 시대든, 사람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이제 나는 그 모든 것을 대신해 나를 원망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아주 작게 들리던 목소리로, "잘 지내"라던 친구의 말을 기억하기로 한다. 눈에 선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친구야, 고맙다. 너도 건강히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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