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떤 생각

북토크에 초대합니다

by 이상희


오랜만에 북토크를 준비하고 있다. 내 책에 담긴 주요 내용을 정리하다 자연스레 떠오른 주제는 ‘아픔과 취약성, 자기 돌봄과 타인 돌봄’이다.


호기롭게 주제를 정해놓고, 샤워하다가도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양배추를 썰거나 고구마를 삶다가도 자꾸 뒷걸음질 쳤다. 나의 정체성으로 - 아프지 않은 사람, 돌봄 제공자, 여성, 관찰자 - 전할 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돌봄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돌봄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 생각은 계속된다. 돌봄을 받는 남편의 입장에 관해 나는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아픈 사람/아프지 않은 사람’ ‘중증/경증’ ‘거동 가능/거동 불가능’ ‘연하 가능/연하 곤란’ 등등 아픔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주르르 따라왔다.


아픔이나 취약성에 붙인 여러 이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 문득, 방향의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장애의 분류를 1, 2, 3등급에서 중증 장애 경증 장애 내지는 정도가 심한 장애와 심하지 않은 장애 등으로 바꿨던 일들이 스쳐 갔다. (남편이 퇴원했을 때는 1급 시각장애였고, 분류 기준과 명칭이 바뀐 후에는 중증의 시각장애 혹은 심한 시각장애로 부른다.)


이름은 명확한 정보를 지시하는 듯 보이지만, 이름 뒤에 서 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감추기도 한다. 분류 역시 그렇다. 남편의 상태를 1급으로 부르던 중증이나 심한 장애로 부르던 그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중증의 시각 장애를 가진 삼십 대 남성’이라는 분류나, ‘중증의 시각 장애를 가진 남편을 돌보는 사십 대 여성’이라는 분류는 우리 삶의 극히 일부만을 설명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받는 사람이라는 분류는 어떤가. 과연 남편은 나에게 어떤 돌봄도 제공하지 않나? 나는 그에게 의존하는 면이 단 하나도 없는가?


아픔과 취약성 앞에서 중요한 것이 그것을 부르는 이름일 리 없다. 그것을 나누고 가르는 분류 기준일 리는 더더욱 없다. 그 이름은 필요한 곳에서 쓰이면 된다. 중요한 건 그 이름을 살고 있는 이들의 하루하루, 그리고 그 하루에 담긴 마음일 테니까. 나의 정체성이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정체성이기에 말할 수 있는 이야기도 분명히 있다.


우리가 삶의 그 많은 번거로움을 뒤로 하고 시간을 내어 서로 마주 보며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분류와 이름에 관한 것이 아니리라. 적어둔 이름 뒤에 서 있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다시 한번 되뇐다. 이름이 아니라 얼굴과 목소리를 만나러 가는 것. 이름이 아니라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북토크초대합니다

#어떤바람


*북토크에 관한 자세한 안내 및 참가 신청은 인스타그램 @jeju.windybooks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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