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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by 이상희

1. ‘나랑 장애는 아무 상관 없는데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는데?’


전장연의 이동권 시위와 관련한 게시물에 달린 댓글.


나는 화면을 훑어 내리던 손을 멈춘다. 가슴이 답답하고 쿡쿡 쑤시듯 아프다.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낯 모르는 이의 마음을 상상한다. 서늘하고 무참하다. 그렇구나. 당신과 장애는 아무 상관이 없구나. 그리고 당신은 그걸 확고하게 믿고 있네.


2. 천선란 작가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를 읽었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채로 표지와 제목에 끌려 산 책이었다. 읽어보니 좀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소설이었다. ‘좀비.‘ 작가도 말했듯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이 소비돼버린 소재. 하지만 오래 좀비를 좋아해왔다는 작가답게 그 많은 좀비물들과는 뭔가 다른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진심이란 이런 것,


“같이 가. 거기까지 데려다줄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를 이렇게는 못 보내겠어. 알아. 우리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마음 우습다는 거. 네가 보기에 같잖다는 거. 오히려 다리가 이렇다 보니 더 걸리적거릴 수도 있겠지.”

은미가 절단된 다리를 바라보았다. (중략)

“그렇게 안 배웠어.”

“…..”

“그리고 당신 그거.”

소녀가 말하는 것은 은미의 절단된 다리였다.

“신경 안 쓰여. 걸리적거린다는 표현은 별로야. 쓰지 마. 우리 앞에서는.”


3. 나는 왜 좀비물을 보며 눈물을 흘릴까. 킹덤의 조선 좀비들도 그랬고, 드라마 해피니스의 아파트 주민 좀비들도 그랬고, 스위트 홈의 괴물형 좀비들도 그랬다. 그들이 자꾸 나를 울린다. 나는 좀비를, 좀비가 된 이를 놓지 못하는 이를, 좀비가 되고도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놓지 못하는 이를 보면 특히 슬퍼지는데, 그건 그들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이미 죽어버린 후에도 놓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끈을 너무 쉽게 놓아버리는, 그리고 그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보이는, 여태 그런 걸 쥐고 사느냐고 나무라는 듯한 분위기가 슬퍼서 울었던 것. 이어지는 상상, ‘사랑을 한다고? 사랑같은 걸 어떻게 믿어? 증거 있어? 사랑은 이익이 안 되잖아. 이익이 안 되는 걸 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 조금만 생각을 해 봐. 너 정말 미쳤어?’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몰라. 그러다 섬뜩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미.


4. 누군가에게 ‘걸리적거린다’는 말을, 그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라는 말을, 걸리적거리는 게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이미 사랑이 곧 두려움이 돼버린 세상에서. 그녀가 써내려간 이야기들은 슬픈 위로가 되었다. 이 책 속에서만은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걸리적거리기에 인간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걸리적거려도 된다는 걸 자꾸 말해줘서. 그걸 지키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5. ‘나는 묵호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리고 또,

이건 나의 예측이지만, 높은 확률로 묵호의 마음도 그럴 거야.

그러니 서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망으로 이어질 확률이 얼마나 돼? 사랑이 파멸이 되고 간절함이 재앙이 될 확률이.’


그런 확률은 없고, 그러니 언제고 어느 때고 사랑을 선택하는 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아니 사실은 그 길 뿐이라고. 답하고 싶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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