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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토 May 13. 2024

세월이 조각난 마음을 메꿨다

온전한 순결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대를 다 닦겠는가

더러워진 방

팍팍 문질러 훔치다 보면

그대를 내가 닦는 것인가

나를 그대가 닦는 것인가

후줄그레한 걸레의 물기에 어른거리는

세월이여, 조각난 마음이여

- 이재무의 시 <걸레질>



남편이 오늘로써 인생을 한 바퀴 다 돌고 새로운 한 바퀴를 시작하는 날이다. 60을 맞이하는 생일이고 회갑이다. 어떻게 인생이 빛의 속도로 돌아 이 자리까지 다시 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단다.


주말 근무를 마치고 부리나케 준비하여 남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남편이 다녀갔지만 이번 생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관계로 SRT 타고 남편 집에 밤늦게 도착했다. 둘이 자축을 하기 위해서다.


너무 사랑해서 아니 젊은 혈기에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여 새로운 생명을 품고 결혼하였다. 애 나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며 그나마 서둘러 준 양가집안의 암묵적인 진행으로 결혼식 4개월 후에 큰 아이를 낳았다. 상하방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한 달에 한번 볼까 말까 한 거리적 거리 두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육체 건강한 이십대라 어쩌다 만난 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둘째가 덜컥 들어섰다. 살림살이는 구차하고 삶은 녹록지 않는데 신체는 건강하여 애는 잘도 들어선다. 어쩌다 내게 온 둘째 아이 덕분에 한숨 돌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밤근무할 때 시어머니가 돌보던 큰아이를 근무 끝나고 퇴근하자마자 받으면 너무 졸려서 나는 방바닥에 가로로 누워 일체가 된다. 제대로 놀아주지 못하고 잠들면 큰애는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똑바로 앉아 자기랑 놀아달라고 재촉한다. 태어난 지 10개월 경부터 둘째가 오빠의 육아 일부분을 맡아주어 둘째 낳기를 잘했다 생각한 첫 번째 기억이 되었다.


직장 생활하며 혼자 독박육아로 지치고 아이들은 온종일 종일반에 머물며 엄마를 기다리는 일상들. 사업 실패로 쫓기는 아빠의 부재로 아들의 침묵의 시간들이 길어졌다. 게임의 세상에서 활기를 찾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행이 필요하든가 아니면 삶의 희망을 놓아야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믿고 맡기는 교육관이 아닌 내가 살고자 비자발적 방임으로 일관하였다. 이 교육관이 들어맞은 것일까. 아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간다.


젊은 날에 사업을 시작하여 결혼 전부터 사장소리 듣던 남편에 대한 멋짐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채로 직장 생활하며 동동거리는 독박육아도 견딜만했다. 남편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사건이 나의 오랜 시간 벗겨지지 않던 콩깍지를 벗겨버렸다. 남자는 돈이 없어도 바람은 필 수 있다는 것. 미련하게 믿어버린 깊이만큼 배신감도 컸다. 남편과 살아온 햇수만큼 가불 하여 좌절하였다. 도저히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10여 년이 지나니 상처 난 마음에 새살이 돋아난 건지 이젠 그 흔적은 있지만 아프진 않다. 내가 남편을 닦은 것인지 남편이 나를 닦은 것인지. 후줄근해진 걸레의 물기만 어른거릴 뿐이다.


한때는 죽고 못살아 결혼했고 자식 낳아 키우면서 투닥거릴 새도 없었다. 사업이 팍 기울어 경제적으로 힘들게 할 때는 안쓰러웠고 배우자로써 배신했을 때는 증오도 하였다. 그러나 애증의 강을 건너니 언제 그랬냐 싶게 비 온 뒤 바닥이  더 다져져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한때는 애쓰며 살아온 인생 자체가 총체적 낭비였다 생각했지만 다시 손잡는 사이가 되고 지긋이 서로를 바라봐줄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어제는 팔당호수 근처 산책길을 걸으며 총체적 난국을 헤쳐 나온 길 위에서 남편은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한다. 전기 자전거 두대를 사서 나와 함께 시간 날 때마다 전국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단다. 그래 계속 함께 해 보자. 세월이 조각 난 마음을 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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