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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May 04. 2019

사랑의 확장

도쿄에서 한동안 머무를 때였다. 숙소에서 역으로 가는 길에 펫샵이 여러 개 있어서 지나다닐 때마다 유리벽 안에 갇힌 강아지나 고양이를 많이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조그만 동물들이 꼬물꼬물 거리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과 함께 사는 지금으로서는 괴롭게 느껴진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강아지는 유리벽을 뛰어오르려고 노력한다. 몇 번이나 벽에 작은 몸을 부딪혀가면서. 고양이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계속 나를 쳐다보면서 울고 좁은 바닥을 뒹굴었다. 대체 내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저 아이들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언제 집이 생길까? 저 강아지나 고양이를 낳은 또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더 혼란스러워진다.

같이 살기 전엔 모른다. 내가 이렇게 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은 우리집에 고양이가 들어오고 나서부터이다. 그 전에는 길고양이를 보든 고양이 카페를 가든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었다. 생명의 무게가 그다지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고양이와, 아니다. 가족 중 고양이가 생기고 나니 완전히 감각이 뒤바껴버렸다. 길거리에서도, 이국의 펫샵에서도 가족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범이가 펫샵에서 왔다면? 단이가 길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통해서 모두 동물들이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로 환원되고 만다. 예전에는 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되는지 알 것 같다. 마음이 가까워지고 나면 고양이라는 카테고리는, 동물이라는 속성은 모두 사라지고 함께 사는 반려로서만 기억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의사표현을 하고, 취향도 있는, 그저 말 못 하는 내 털복숭이 친구들. 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키우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 한다면 이런 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전에는 어떤 모양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든가 하는 취향이 있었다. 하얀 고양이면 좋겠다든가, 장모이면 좋겠다든가. 하지만 정작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들 중 하얀 고양이는 없다. 막내인 랑이는 검정 고양이다. 나는 내가 검정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리라는 예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에게 어떤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냐고 묻자 남편은 한 장의 사진을 보내줬다. 우리집 애들과 전혀 상관 없는 외관이었다.

우리집 애들이 더 예쁘지 않나?
그렇지.

이런 팔불출 대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얼마나 유난스러운가. 사랑하게 되니 그 아이가 무슨 색인지, 어떤 무늬인지는 상관 없어졌다. 정확히는 그 아이가 그 색이기 때문에 그 무늬이기 때문에 모습이 사랑스러워진다. 검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기를 거라고도. 사랑에 빠지는 데 계기나 시간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조건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정 고양이를 발견할 때마다 남편에게 “여기에도 랑이가 있어” 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남편은 “랑이 같은 애는 랑이밖에 없어” 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주의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밥 달라고 하는 랑이


남편이 키우고 싶었던 고양이(우리집 애들이 더 예쁘다는 건 그냥 팔불출)


우리집 고양이들의 다른 사진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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