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씨앗을 퍼트려 만물(萬物)을 움트게 하라(13)
인과응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이다(8)
묘법 노스님의 법문 중 일부이다.
기문동(記文東)이라는 마흔 살 남짓 된 한 남자가 몸에 상복을 걸치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방금 땅에 묻힌 이웃에 사는 장(張) 아주머니의 무덤 앞에 꿇어앉아 오랫동안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몸집이 우람하고 풍채가 당당한 이 대장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약 장 씨 아주머니의 보살핌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일찍이 인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친척도 아니면서 친척보다 나았던 장 씨 아주머니, 지금 그녀가 돌아가셨으니, 그에게 남은 것은 회고하기 싫은 지난 일뿐이었다.
문동의 부모는 문동이 다섯 살 때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연달아 돌아가셨다. 문동의 아버지는 임종 전에 눈물을 머금고 자기가 신임하는 큰 형님, 큰 형수에게 문동의 뒷일을 부탁하면서 세 칸짜리 기와집과 한 마리 소 그리고 삼백 원의 저금과 문동 엄마의 예물 장식 등 모든 재산을 문동을 대신하여 관리하도록 건네주었다.
큰 형님과 형수는 굳게 맹세하며 하늘을 가리켜 서약하면서 “네 아이가 바로 우리 아이 아닌가. 네가 남긴 이렇게 많은 재산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한 푼도 모자라지 않게 문동이 클 때까지 우리가 지켜줄게. 남도 돌봐야 할 텐데 하물며 우리들은 본래 한 집 안 한 형제가 아닌가!”라고 말하였다.
문동의 아버지는 이 말을 들은 후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두 눈을 감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마을의 간부와 이웃들도 모두 감동되어 울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후 며칠이 되지 않아 이웃의 장 씨 아주머니는 문동이 가 매를 맞으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을 사이에 두고 문동의 큰 아버지와 어머니가 애를 꾸짖으며 때리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는데, 마음씨 좋은 장 아주머니는 그들을 달래려고 여러 차례 건너갔으나 모든 게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 그녀는 아이가 놀러 나오는 게 매우 드물다는 것을 느꼈으며, 가끔 아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이의 웃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장 아주머니가 물어도 아이는 놀라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아주머니는 또 아이가 무척 수척해졌을 뿐 아니라 몸과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선량한 장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며, 이런 사정을 마을 친척들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촌 간부가 그들 부부에게 질문하였을 때도 그들은 모르는 척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제삼자의 입장에서 걱정한다고 애 교육이 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아이를 학대한다는 물증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을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모두들 비록 수군거리며 그들을 욕하였지만, 문동을 도와주려고 해도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해가 가면서 아이는 점점 장성하였다. 장 아주머니는 그들 부부가 없을 때를 이용하여 아이에게 자주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하였다. 비록 한 개의 옥수수 찐빵과 반토막 고구마지만 그녀는 아이가 큰 입으로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아이가 장성함에 따라 키가 컸는데도 몸에 걸친 것은 여전히 1~2년 전 짧고 작은 다 떨어진 바지였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은 그런대로 지낼 만하나, 겨울이 되면 얼마나 추울지 안쓰러워 장 아주머니는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문동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장 아주머니는 자기 집 아이가 입었던 무명옷과 면바지를 찾아 깨끗이 빨고 해진 곳을 기워 밤을 새워 만든 후 억지로 웃으면서 문동의 큰 아버지 댁에 보내면서 이 면 옷을 자기 집 아이는 보기 안 좋다고 싫어하니, 당신네 문동에게 입히라고 말하면서 손수 문동에게 옷을 걸쳐 주었다.
이와 같은 생활환경 속에서 문동은 마침내 장성하여 인재가 되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트랙터를 끌면서 수리도 잘하였다. 그를 따르는 아가씨가 많았다. 혼담이 오가면서 그는 마침내 아주머니에게 자기가 단독의 가정을 꾸릴 일을 이야기하였다.
비록 그의 큰 아버지네는 원하지 않을지라도 동네 청년들과 친척들의 여론에 밀려 그의 큰 아버지는 감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의 경제 사정이 어려움을 핑계로 단지 세 칸의 부서지고 오래된 기와집을 문동에게 돌려주고 집안의 가재도구들은 이미 옮겨 놓은 빈집이었다. 그들 부부는 20여 년의 세월 속에서 6명의 아이를 낳아 두 명의 아들에게 새집을 장만하여 분가시켰다.
문동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불평하면서 소송을 걸라고 말하자, 그는 말하기를 “큰아버지가 저를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건과 돈은 제가 벌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남자는 논밭을 다투지 않고, 좋은 여자는 시집갈 때 입는 옷을 다투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기술을 배우지 않고 바른생활(직업)에 힘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재산도 보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제가 반드시 기술을 잘 배워 우리 마을을 위해 일하면, 우리 마을 사람들의 면목을 서게 하는 것이며, 큰 아버지, 큰 어머니의 양육의 은혜를 갚는 일일 것입니다.”라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문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문동은 향진기업의 공장장이며, 그의 아들은 도시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일가족 모두 행복이 충만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의를 저버린 문동의 큰 아버지 집을 보자, 그는 모두 2남 4녀를 낳았는데, 큰딸은 29세 때 신장결석을 앓아 죽었으며, 작은 딸은 29세 때 또 같은 병에 걸려 죽었다. 두 부부는 몹시 놀라고 얼이 빠져 이후 또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 주야로 노심초사하고 있다.
6명의 자녀 중 셋이 죽고 얼마 안 있어 작은 아들이 무리를 지어 싸움하고 강도짓을 하여 10년 징역형을 살게 되었으며, 그는 이미 감옥의 단골손님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가 법정에서 선고받는 당일 노모, 문동의 큰 어머니는 갑자기 뇌일혈이 발생하여 침상에 누워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으며, 자기 아들로부터 백안시(업신여기고 무시하는 태도)와 책망을 다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여 항상 옷이 오줌에 젖어 있어도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러한 삶을 3년여 살다가 처량하게 생을 마쳤다.
큰 어머니가 죽기 전에 큰 아버지는 노인성 치매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다. 아내가 죽은 지 반년 후 큰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 넘어져 머리를 다쳐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웃 사람이 나에게 그녀들 고향의 두 가지 이야기를 한 후 이게 인과응보가 아닌지 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고향 사람들 모두 이것을 하늘이 그들에게 내리는 징벌이라고 말하더군요.”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곡식을 심은 것과 같이 어떤 종자를 심으면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에게 법을 설하시기 전에 인과율(因果律)은 대자연에 적용되고 있었으며, 단지 우리들 범부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고해(苦海: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불보살이 자비로 다시 원력에 따라 인간 세상에 와서 우주의 섭리를 말씀하시고 아울러 우리들로 하여금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는 방법을 일러주셨으니, 우리들은 반드시 이번 인간의 몸을 얻었을 때 여법하게 수행하여, 조속히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바른길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