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만물)을 움트게 하라(18)
현재의 삶은 인과응보로 받아들여라(1), 부설거사 이야기(2)
일타큰스님 법어집 중에서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고, 금생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왜 어제는 돌아볼 줄 알면서 전생은 묵살하고, 내일은 기약하면서도 내생은 잊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전생과 내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지금, 이 순간에 너무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산의 모습과 같이, 우리의 삶 또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기 마련이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보이는 것 밑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잊은 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보이는 세계까지 지배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고난 속에 처하였을 때는 더 문제이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만 하여도 보다 편안하고 향상된 길로 나아갈 수 있을 터인데,‘그 무엇’을 무시하여 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더 큰 고난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란 정녕 무엇인가? 바로‘업(業)’이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業이 그것이다. 특히‘악업(惡業)’은 무섭다. 악업은 인정사정이 없다. 내가 지은 악업이 무르익으면 ‘나’에게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이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을 확실히 믿고서,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나’의 지은 바에 대한 과보라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능히 業을 녹여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만, 고난에 처하여 남을 원망하거나 회피만 하는 사람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러므로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는 고난에 처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셨다.
“내가 오랜 옛적부터 무수한 생애 동안 근본을 버리고 말초적인 것만 쫓아, 생사의 물결 속을 떠다니면서 무수한 원한과 미움을 쌓았으리라 또한 남의 뜻을 거스르고 피해를 준 일도 무한하리라.
비록 지금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숙세에 내가 지은 악업의 열매가 익었을 뿐 하늘이나 다른 사람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니, 오직 내가 지은 바를 받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이 말씀처럼,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은 숙세에 지은 악업에 열매가 무르익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 자는 능히 고난을 넘어설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원한과 미움을 수레바퀴의 축으로 삼아 끝없이 윤회하게 된다.
(2) 세속에서 도를 이룬 부설거사 이야기
신라시대 때 부설 거사(浮雪居士)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은 진(陳) 씨, 이름은 광세(光世)이며 선덕여왕 때 경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출가하여 불국사에서 원정(園淨)의 제자가 된 뒤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어느 해 오대산으로 가던 중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는 18세 된 묘화(妙花)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이 처녀가 부설 스님을 보는 순간부터 스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처녀는 결국 부설 스님에게 함께 살자고 애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부설 스님은 승려의 본분을 들어 번번이 거절하자, 묘화는 마침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이에 부설 스님은 생각했습니다.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 아닌가.’
부설 스님은 마침내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제 스님이 아니라 부설 거사가 된 그는 15년을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습니다. 그들이 장성하자 부설 거사는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따로 별당을 지어 수도에만 전념했습니다.
거사의 몸은 비록 마을에 있었으나, 어느덧 마음은 지극히 순화되어 견성(見性: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을 이루었으니 늘 기쁘고 즐겁고 편안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수를 안 해도 얼굴에는 항상 광명이 나고, 옷을 빨아 입지 않아도 때가 묻지 않는 이구지보살(離垢地菩薩)이 되었습니다.
‘이구지’라는 말은 때가 떨어져 나갔다는 말로써 마음의 때가 없으니 몸에도 때가 묻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부설 거사가 참선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옛날에 함께 수행했던 영조(靈照)⋅영희(靈熙) 두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두 스님은 처자식을 거느리고 참선하는 부설 거사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사람아, 처자식 거느리고 사는 맛이 어떤가? 이제 도는 멀리 가버렸겠구먼!”
“나는 그저 이렇게 세월만 보낸다네. 자네들은 그동안 산수 좋은 수도처를 다니면서 도를 많이 닦으셨겠네. 내가 자네들이 올 줄 알고 저기 물병 세 개를 걸어 놓았네. 우리 저 물병으로 도력(道力)을 한 번 시험해 보세.”
두 스님은 이상한 시험도 다 있다 하면서 부설 거사가 지키는 대로 방망이를 가지고 차례로 병을 때렸습니다. 먼저 영조 스님이 방방이로 병을 딱 때리니 병이 깨지면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다음에 영희 스님이 방망이로 두 번째 병을 때리니 마찬가지로 병이 깨지고 물이 쏟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설 거사가 방망이를 받아 병을 때리자 병은 깨졌는데 물은 그래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출가한 사람이면서도 도력이 미치지 못했네. 재가(在家)의 처사가 이런 높은 도력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네.”
그러자 부설 거사는 이렇게 게송을 외웠습니다.
눈으로 보되 보는 바가 없으니 분멸할 것이 없고
귀로 듣되 듣는 바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도다.
분별심과 시비의 마음을 다 놓아 버리니
다만 마음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 뿐이다.
인도의 유마(維摩) 거사, 중국의 방(龐) 거사와 함께 부설 거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사로 손꼽힙니다.
물론 수도 환경이 좋은 산중에서 도를 닦으면 더욱 좋겠지만, 세속에 살면서도 꾸준히 참선⋅염불 등의 수행을 하면 마음이 차츰 순화되고 절로 선행(善行)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선행을 쌓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이런 선행을 쌓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냥 그저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고 하여 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비록 세속에서 생활을 하더라도 도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세속에 살더라도 마음을 닦아 선행을 이루면, 몸만 출가하고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수행인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心)이다.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가 중요한 것이다. 마음이 삿되지 아니하고 진실해야 나중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겉은 화려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거창한 말솜씨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물건을 파는 행위를 들여다보자.
순수한 사람, 어르신 들은 그 말에 다 속아 넘어가기가 일쑤다. 나중에 보면 사기꾼이 진짜인 양 번지르 한 말로 물건을 팔고 사기죄로 처벌을 받는 사례를 방송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남에게 모함이나 욕설하는 것⋅선량한 사람을 속이고 신뢰를 훼손하는 것⋅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고, 삿된 길로 가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자 들은 신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장작 더미를 짊어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상 마음은 善과 義를 향해 나침반처럼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善과 義는 국민의 행복과 이익, 국가의 안위이며, 개인적으로는 나의 행복과 이익, 상대의 행복과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나라의 안위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더라도 나만 이익을 보고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거나, 더 나아가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언젠가는 그 과보를 반드시 되돌려 받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