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만, 잘 몰라서
1976년 제1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시상을 하러 나온 ‘멜 토메’는 같이 나온 ‘엘라 피츠제랄드’에게 이렇게 묻는다.
엘라, 재즈란 무엇이죠?
엘라는 고민하다 대답한다. 이런 건 어때요. 쌉빠!! 삐루르노 바르루바. 같이 해요! 그러자 멜 토메가 슈비두바 두바두바 다다다답이라며 같이 스캣을 한다. 정말 환상의 쌉빠 커플이 아닐 수 없는데, 이거 제가 지어내는 거 아니고 유튜브에 진짜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2021년, 유튜브 165만 구독자를 보유한 조승연은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피아니스트 윤석철과 재즈를 탐구하는 영상을 찍는다. 그리고 묻는다. 도대체 재즈가 뭐죠? 윤석철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영원히 재즈를 모른다는 문구를 어디선가 들었다고 답한다. 조승연의 황당해하는 반응에, 윤석철은 냅다 피아노를 친다. 지금의 내 마음은 이렇다고, 느껴지냐고, 이게 재즈라고.
전 세계 약장수들이 다 재즈씬으로 넘어온 것인가. 강한 의심이 들지만, 나 역시 적당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의 문장으로 서술하라는 것만큼이나 힘든 질문이기에.
나를 만든 것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음악이다. 그중에서도 재즈. 물론 가요도, 팝도, 클래식도 듣지만 평생 하나의 장르만 들어야 한다고 하면 주저 없이 재즈를 선택하겠다.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알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행복해하며 들었다. 습관처럼, 중독처럼. 지금 듣는 곡이 스윙인지, 비밥인지 알 게 뭐야. 교양은 없지만, 추억이 많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앞으로의 글들도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가 될 것이다. 너무 방대한 소재이다 보니 사실 오늘은 간단히 자주 들었던 장르를 소개하는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도.
가장 대중적인 건 아무래도 스윙이다. 대공황에 압도되었던 미국의 30년대를 그나마 포근하게 데워주었던 빅밴드 연주 중심의 흥겨운 곡들이다. 엘라(1 문단의 그녀)와 루이 암스트롱의 듀엣곡’ check to check’이나 글렌 밀러의 연주곡 ‘in the mood’ 같은. 댄스홀에서 빨갛게 상기된 볼로 춤을 추는 남녀가 연상되고, 그리고 왠지 그 둘은 결혼해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 집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해피엔딩. 의인화를 해 보고 싶다. 스윙은 결혼하면 좋을 사람이다. 예측이 가능한 사람, 긍정적이고 건강하고, 술담배를 거의 하지 않는. 갑자기 집에 내 친구들을 불러도 넌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없니라는 말 대신 그럼 내가 맥주 사 올까? 라며 신나 한다. 혼자서도 잘 놀고, 둘이서도 잘 놀고. 이 사람과 함께라면 단순해진다 싶은 새나라의 어른이.
그리고 40년대가 되어 비밥이 도래하였다. 외로운 늑대 포지션의 뮤지션들이 많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마일즈 데이비스. 스윙보다 엇박이 심해지고, 폭발적이고 예측불가한 코드의 독주로 진행되는 만큼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장르였다. 스윙이 예측 가능한 반장 재질이라면 이들은 일진과 다이다이를 뜨는 애들이다. 학교 규율은 반항심이 아니라 애초에 관심이 없어서 못 지키고 누가 먼저 건들지 않는 한 조용히 지내지만 얼굴에는 항상 상처가 나있지. 마이웨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개썅을 붙여줘야 한다. 당신은 혼자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버스킹에 몰두해 있는 비밥이를 발견하고 훅 빠질지 모른다. 기다렸다가 비밥이에게 칭찬을 해 보자. 그 애는 자신만 아는 맛집(노포에 싸고 양 많이 줌.)에 당신을 데려갈지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개인위생 관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 있다. 무슨 책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따라간 비밥이 자취방에서(고등학생이지만 무조건 자취함) 비밥이는 30만 원만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월세가 밀렸다고. 그리하여 당신은 깨닫는다. 천재들은 경제관념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연인이 아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둘 다면 좋고) 이들의 인생에 휘말리게 되면 평생 조연도 아닌 단역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안녕을 고한다. 비밥이, 아듀.
비밥으로 지친 나에게 드디어 달밤의 소년 같은 쿨재즈가 등장한다. 사실 쿨재즈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는데 좋아하는 뮤지션들을 모아보니 다 그 계열이었다. 쳇 베이커, 빌 에반스, 제리 멀리건, 스탄 게츠 등. 쿨 재즈에서의 쿨은 시원하다 멋지다의 뜻이 아니라 ‘냉소적인’이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여름에 틀어놓고 자면 잠이 쿨쿨 온다고 해서 쿨재즈라나. 싱거운 냥반 같으니. 쿨 재즈는 비밥과 아주 대조적인 장르다. 좀 더 조용하고, 차분하고, 멜랑꼴리 하다. 고민 많은 우등반 학생처럼, 속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연주가 진행될수록 아주 차분하게 얘기를 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사실 나는 말이야… 달밤을 거닐다가 문득 당신은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차갑다고 소문난 아이인데, 그렇지 않구나. 달빛을 받은 옆얼굴은 꽤나 섬세하고 좋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쿠아 계열의 산뜻한 향수 냄새? 같은 장소를 계속 돌면서 얘기를 하다가 막차 때문에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다. 그 애는 강남 트리마제로, 당신은 걸어서 당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씻고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틀면 마침 이런 음악이 소개되고 있다.
오늘은 달이 무척 밝은 밤이죠. 이런 밤에 어울리는 곡으로 골라봤습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기념비적인 명반 ‘The Birth Of Cool’에 실린 곡인데요. 게리 멀리건의 연주로 들어보시죠. ‘Moon Dreams.’
아 참, 잘 자요.
마침, 창밖으로 얌전히 떠 있는 달을 보며 당신은 생각한다. 내일 당장 다른 애들 앞에서 친한 척 굴면 안 되겠지? 낮에 뜬 달처럼 그 애는 수줍음이 많은 거야. 아까도 사실 ‘나는 말이야…’ 다음에 뭐라고 하는지 너무 속삭여서 못 들었어. 궁금한데… 내일 바로 물어보면 안 되겠지. 아, 머리 말려야 하는데. 졸리네. 근데 이 음악이 뭐라고 했지… 머리 말려야 하는데… 쿨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