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끓여주는 라면, 먹고 갈래요?

맛있는데 왜 눈물이 나지?

by 비단구름

“이 근처에 라면집 있는데.”

금촌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통일로를 달리던 케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라면? 무슨 라면?”

“어떤 할머니가 끓여주는 라면이라는데 이것저것 많이 넣고 끓이나 봐. 이 근처 어디일 텐데.”


가끔 배짱 장사를 해보는 상상을 한다. 장사할 엄두도 못 내는 성격이지만.


메뉴는 국밥? 잔치국수? 수제비? 칼국수? 아니지, 배짱 장사라면 그날그날 주인 맘대로 줘야지.

“주는 대로 먹어!” 이러면서.


영업시간도 주인 마음대로다. 점심 장사만 하던지, 저녁 장사만 하던지, 아니면 재료 소진 시까지만 하던지.

“오늘 장사 끝났어!” 이러면서.


이렇게 장사해도 먹고살만하다면, 큰 욕심부리지 않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라면,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함께 행복한 사회라면,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이러니 나는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 날, 간판도 없이 라면을 판다는 라면집을 찾아 나섰다. 인터넷으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간판이 없고, 점심 장사만 한다. 그마저도 재료가 떨어지면 오늘 장사 끝이다. 휴무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전화번호도 없어 가보고 열려 있으면 먹고 닫혀 있으면 허탕이다. 내가 상상하던 딱 그대로 장사하는 배짱 장사의 고수가 진짜 존재한다니!


‘오늘처럼 비 오는 날 라면 먹으면 맛있겠다.’


‘비 온다고 장사 안 하면 어쩌지?’


‘벌써 줄 서있으면 어쩌지?’


‘주차장이 있을 거 같지 않은데 차는 어디다 대지?’


굵은 빗줄기가 자동차 앞 유리로 세차게 떨어졌다. 통일로를 한참 달리다 은둔 고수를 만나러 가는 필수 코스인 듯한 좁은 황소바위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가정집을 보이는 간판 없는 라면집이 있다.


-열려 있으면 영업합니다. 닫혀 있으면 영업 종료. 노크 금지-


고수의 은신처다운 기백이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12시 전에 도착해서인지 대기 줄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남색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일어섰다.


‘라면 2800원’


벽에 붙여 놓은 손글씨 한 장, 역시 메뉴는 한 가지다.


“라면 세 개요.”라고 하니 할아버지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되묻는다.

“세 개? 매운맛, 안 매운맛 있는데?”

“매운맛은 많이 매운 가요? 저 매운 거 못 먹어요.”

“매운 건 많이 매워. 많이 안 맵게 해 줄게.”

“애들은 매운 거, 전 안 매운 거로 주세요.”

“그럼 애들은 매운 거 많이는 안 맵게 해 주고 안 매운 거 하나.”


원래 라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데다 어느 후기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하는 글을 읽고 간 탓에 높은 기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야근하는 날이면 엄마는 저녁으로 라면을 끓이시곤 했어. 아빠는 밀가루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거든. 라면은 아빠가 야근하시는 날만 먹을 수 있었어."

“그런 분들 많지. 옛날에 밀가루를 많이 먹어서 그래. 게다가 미군 부대에서 주는 밀가루는 품질이라곤 없는 것이었어.” 케이가 말했다.

“밀가루 냄새도 싫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지. 우리 아버지도 하루는 밀가루 음식 안 먹겠다고 울며 투정을 부려 큰 고모가 밥을 해서 주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엄마는 밀가루 음식이라면 모두 좋아하셨어. 밀가루 부침개, 라면, 국수, 칼국수, 수제비, 꽈배기 도넛까지 가리지 않고 좋아하셨지."

"쇠고기 라면 먹다 신라면과 너구리가 나왔을 때의 충격이 생생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니, 하고 놀랐지."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하면서 라면 사 먹는 애들 부러웠어.”

케이가 누군가를 부럽다고 표현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자기도 사 먹지 그랬어.”

케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아차 했다.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니까.”

케이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커다란 쟁반에 담아 온 라면을 내려놓는 순간 라면 위에 넉넉하게 올려놓은 고명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풍부한 재료가 뽐내는 맛이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집의 분위기를 떠나서 노부부의 라면은 감사하게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이천 팔백 원에 이 정성이라니. 이 푸짐한 라면을 이천 팔백 원에 제공해 주는 노부부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하는 라면. 라면 한 그릇을 다 먹는 동안 이천 팔백 원에 이렇게 정성스럽게 끓인 라면을 주는 노부부를 향해 ‘고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라면이었다. 세상 물정에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아이들이 이 가격에 라면을 팔고도 수익이 나는 건지 걱정했다. 만약 이사를 가면 이 맛있는 라면집 근처로 이사를 와야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라면 같아. 어머니는 밭에서 나는 채소, 냉장고에 있던 자투리 채소들을 몽땅 썰어 라면에 넣으시곤 했지. 대파, 당근, 양파, 가리지 않고 잡히는 대로 넣으셨어.”

케이가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라면에 대해 설명했다.

“파주식인가? 아니면 경기북부식인가?”

내가 물었다.

“우리 어머니 스타일이지.”

케이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고수의 손맛이 느껴질 그걸 흉내 낼 수 있을까. 하지만 흉내 내보려고 한다.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에서 케이에게 어머니가 끓여주던 추억의 라면을 끓여주기 위해.


구옥의 라면집구석에서 반짝거리는 에어컨이 손님들의 땀을 쾌적하게 식혀주었다.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것을 보아 설치한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자식들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설치해 드렸을까? 아니면 고수의 시설 투자인가? 라면을 먹으면서 즐거운 상상을 했다. 비닐도 뜯지 않은 에어컨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당분간 노부부의 라면집은 영업중일 모양이라고.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슬쩍 다가오시더니 윤식당의 신구아저씨처럼 무심하게 툭 권하신다.

“국물도 다 먹어. 몸에 좋은 거야.” 몸에 좋은 여러 가지 채소가 노부부의 정성만큼 우러난 국물이란 뜻일 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붕어빵 할머니는 꽈배기 도넛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