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파에 바람 든 재킷
비극의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주고 싶은 마음
“네가 있어 행복해. 고마워.”
결혼식을 가려고 보니 아무래도 재킷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차려입지는 않더라도 티셔츠를 입는 것보다는 때와 장소와 목적에 맞게 입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되었다. 온라인으로 저렴한 재킷을 살까, 고민하다 아이한테 말했더니 아웃렛에 가자고 했다.
“에이, 엄마, 그래도 직접 입어보고 사야 하지 않겠어?”
재킷을 입은 지가 오래되어서인지 어떤 재킷을 입어봐야 할지부터 난감했다. 목이 빳빳한 도도한 재킷들한테 포위된 것 같은 화려한 공간에서 생애 처음 재킷을 사는 사람처럼 재킷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직원이 추천해 주는 재킷을 받아 들었다. 재킷 입을 일이 없어 통 입지를 않아서인지 여러 벌의 재킷을 입어 봐도 번번이 어울리지 않는 재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어정쩡하게 섰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 낯선 차림의 나는 어색해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재킷이라니,’ 허파에 바람난 것 마냥 한편으론 마음이 들뜬다.
여러 벌의 재킷 중 마음에 드는 재킷을 어찌어찌 세 벌을 추려냈는데 하나는 9만 원대, 하나는 16만 원대, 하나는 27만 원대였다.
“오, 엄마, 이게 가장 나은데? 입자마자 핏이 살아!”
옷을 골라주던 아이의 눈에도 거울 앞에 선 내 눈에도 27만 원대 재킷은 입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가격만 빼고는.
어떤 사람에게 27만 원짜리 재킷은 비싼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로엔 벤츠와 아우디와 비엠더블유가 넘치고, 수입차가 아니더라도 대형 SUV가 넘치고, 자녀 교육비로 한 달에 이삼백을 우습게 쓰고, 명절마다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로 공항이 북새통이라던데.
데이트할 때 오마카세에 와인 정도는 먹어줘야 하고, 혼자 있을 땐 고급 위스키 정도는 홀짝여줘야 한다던데.
신혼은 수도권 아파트에서 시작하고 신혼가전으로는 비스포크나 오브제 정도로 꽉꽉 채워줘야 한다던데. 그깟 27만 원이 뭐 돈이라고.
요즘 티브이를 보면 이 정도 가격의 재킷을 살 수 있는 능력자가 많아 보이는데(나만 빼고 다) 나에게 27만 원 재킷은 일정한 수입이 없는 주부가 특별한 날 한 번씩 입으려고 사기에는 너무 고가의 가격이다. 그런데 이 재킷 너무 예쁘다. 재킷 라인이 잘 빠져서 나까지도 예뻐 보인다.
거울 앞에 서서 재킷 입은 모습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앞모습도 보고 뒷모습도 보았다. 살이 올라 둔해진 허리의 곡선을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잡아 주는지 허리가 다시 짤록해지고 맵시가 살아났다. 은은한 황색 조명 아래 거울에 비친 자태에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러게요. 핏이 예쁘네요.”
재킷 입은 모습을 보고 직원이 연신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다. 직원의 말이 상술이든 진심이든 상관없이 내 마음에도, 함께 옷을 골라주던 딸아이의 마음에도 쏙 들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지만.
“죄송해요. 조금 더 돌아보고 올게요.”
결국 나는 아이와 함께 매장을 나왔다.
“그러세요. 고객님께 정말 잘 어울렸어요.”
직원도 내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친절하게 보내주었다.
“재킷을 많이 입는 것도 아닌데 굳이 비싼 재킷을 입을 필요는 없지. 안 그래?”
나는 나쁘지 않았던, 그렇다고 딱 맘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던 9만 원대 재킷을 사기로 결정했다. 얼마인지 알려주지는 않지만 뻔한 케이의 수입,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사라져 버리는 생활비, 가뭄에 드러낸 맨바닥 같은 잔고가 머리를 스쳤다.
하나도 아깝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나 지금이 한참 돈 들어갈 일이 많은 고단한 시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빠르게 상승하는 밥상물가와 퇴근하면 겨우 스마트폰을 끌어안고 누워 있고 싶어 하는 노쇠하는 중인 케이를 보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렴풋한 위기감까지 느끼고 있어 철이 없었던 전과 달리 불필요한 소비, 이를테면 내 옷을 사는 일 따위를 줄이는데 몹시 인내심을 발휘하며 뭔지 모르지만 뭔가를 대비하고 있다.
“이만하면 꽤 좋은 재킷이지! 이 정도 재킷을 살 수 있다니 내 형편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정작 나는 예산과 자산을 고려하여 합리적이고 적절한 수준의 재킷을 사기로 결정한 성숙한 판단에 흐뭇함과 대한민국 중산층 주부로서의 자부심마저 느꼈는데 따라 나온 아이의 심경은 복잡해 보였다. 몇 해 전 중국 여행 갈 때 주섬주섬 끄집어 캐리어에 담아 놓은 내 옷가지들을 보고 “엄마도 옷 사.”라고 말했을 때 지었던 시무룩한 표정과 흡사하다. 그때 나는 아이가 나의 궁색함을 속상해할 만큼 다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킷을 입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이렇게도 보고 뒤로 돌아 뒤태도 살피고 하는데 직원이 다가와 같은 모델 다른 색상의 재킷도 권하며 대 주었다. 얇은 검정 니트 티셔츠도 꺼내와 재킷 안에 대서 보여주었다.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짙은 회색 운동복 바지와 목이 늘어난 너덜너덜한 티 쪼가리 위에 재킷을 걸치고 있는 나에게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검정 티셔츠는 집에 많이 있어요.”
"재킷이 수선할 것도 없이 딱 맞네요.”
직원이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이미 허파에 잔뜩 바람 든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재취업을 위해 고객님 연령 분들도 면접 많이 보셔서 재킷을 많이 찾으세요.”
“그렇군요. 재킷 고르느라 매장을 거의 다 돌은 것 같아요.”
“저희 옷이 가성비가 좋아서 한 번 오신 분들은 또 오세요. 가격은 착한데 퀄리티가 좋거든요.”
“아무래도 살림하는 입장에서 비싼 옷 사는 건 망설여져요.”
나는 직원에게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요. 그래서 고객들이 저희 매장 계속 오세요. 어차피 아무리 비싼 옷 사봐야 길면 2년 입으면 못 입는다고요. 이상하게 질리고 유행에 쳐진 것 같고 그러니까요. 옷장에 옷은 많은데, 철마다 옷을 사는데 입고 나가려면 또 없잖아요. 가장 예쁜 옷은 뭐다? 신상이다!”
직원의 농담에 매장을 돌아다니며 재킷을 고르던 목덜미가 뻣뻣한 긴장감에서 벗어나 나는 비로소 웃음이 났다.
“결혼하고 나서는 돈 있으면 아이들한테 쓰자, 이렇게 바뀌었어요.”
“그렇죠. 엄마들 다 비슷하죠.”
“그럼요, 그럼요, 엄마들은 다 그렇죠. 하하하!”
나는 아이가 속상하지 않도록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이며, 엄마는 절대 가여운 사람이 아니며, 세상 엄마들은 다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런 상황이 절대 나쁜 상황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몹시 행복한 삶이며, 따라서 네가 속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더 과장되고 쾌활하고 높은 톤으로 웃었다. 아웃렛에서 가장 저렴한 재킷을 찾는 초라함을 덤덤하게 바꾸어주는 직원과 주거니 받거니 웃고 떠드니 신났다.
“이 옷 입고 돈 많이 벌었으면 좋겠네요.”
계산을 마친 직원이 재킷을 넣은 쇼핑백을 건네며 친정 언니가 덕담을 건네듯 용기를 주었다. 힘주어 전하는 목소리에 힘을 받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는 이미 저 너머로 넘어가 어둑어둑해진 길을 딸아이와 함께 걸었다.
“엄마,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좋은 재킷 사줄게.”
딸아이가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엄만 이거도 충분히 좋아. 아까 엄마 입어봤을 때 봤지? 참 잘 어울리지 않았어? 엄만 아무거나 입어도 찰떡같이 소화한다니까!”
“그래도 사줄 거야.”
딸아이가 힘을 주어 굳은 다짐을 하듯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컴컴해진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너머에서 비치고 있을 푸른빛을 아침이 되면 맞이할 거다. 그거면 되었다. 이 저녁 나는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충분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