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거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못 먹는 음식은 없지만 덜 찾는 음식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편식을 하지 않고 여러 가지 식재료와 레시피를 즐길 수 있으면 내가 사는 세계가 넓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습득하면 막상 되게 편한 것처럼 다양한 식재료와 레시피를 수용할 수 있으면 사는 게 몹시 편하다.
식재료와 레시피에 대한 호불호가 없어 무엇이든 맛있게 먹는다. 누가 만들어줘도 맛있게 먹는다. 요리 못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도 맛있게 먹어 땅 파고 나온 초보 요리사에게조차 해냈다는 성취감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이런 걸 보면 나는 그저 잘 먹는 사람일 뿐, 음식 앞에서식욕만 있는 단순한 사람일 뿐, 냉정한 미식가는 아닌 듯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놓인 음식이 맛있어서 행복할 때마다 생각한다. ‘편식을 하지 않아 사는 게 참 편하다'고. 세상엔 먹을 것 천지이고 이걸 다 먹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행복한가!
◎ 이기지 않는 행복
편식을 하지 않아 특별히 더 좋은 점이 있다. 가족이든, 친구든, 그냥 아는 사람이든, 누구와 식사를 하든 메뉴를 정할 때 다 맞춰줄 수 있다. 내가 먹지 못하는 메뉴가 정해졌다고 해서 불편할 일이 없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메뉴로 정했다고 해서 마음 상할 일이 없다. 오히려 상대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이 행복하다.
“그게 뭐가 행복해?”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경험해 보면 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춰주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만족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남한테 맞추는 게 행복한 거야?”라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이기지 않는 행복으로 내 마음이 채워지는 풍만한 행복이 있다.
“그래도 난 좀 이해가 안 가는데?”라고 생각된다면 반대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둔 상대의 표정, 먹지 못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난처한 상대의 표정, 신념적으로나 종교적인 이유나 건강상의 이유로 먹지 않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난감한 상대의 표정.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내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순수한 아기 같은 마음이다.
한식을 먹자 하든, 국밥을 먹자 하든, 양식을 선호하든, 햄과 계란과 빵으로 구성된 브런치를 먹자고 하든 다 맞춰줄 수 있다. 느끼한 음식도, 기름진 음식도, 민숭민숭한 음식도 다 맞춰줄 수 있다. 맵찔이긴 하지만 상대가 얼큰한 강릉 장칼국수를 먹자고 하거나, 땀구멍마다 땀이 배어 나오는 매콤한 낙지볶음을 먹자고 해도 거절하지 않는다. ‘하루 먹었다고 살찌지 않아.’라고 느긋하게 구는 것처럼 ‘매운 거 한 번 먹는다고 죽지 않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 배려심 가득한 사람과 밥 먹을 때
먹지 못하는 음식도 없고, 먹지 않는 음식도 없다 보니 곤란한 경우는 오히려 배려심 가득한 상대, 그러면서 나처럼 아무거나 잘 먹는 상대를 만나는 경우다.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봐.”라고 상대가 아무리 배려해도 나 또한 정말 괜찮아서 “난 진짜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가리는 거 없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면 배려심으로 중무장한 채 ‘네가 좋아하는 걸 먹게 하고 말겠어.’라고 결심한 마음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상대가 말한다. “그러지 말고 진짜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그러면 나도 진심을 담은 표정으로 애원하다시피 말한다. “나는 진짜 다 좋아하는데.” 결국 가위바위보를 해야 하나, 사다리를 타야 하나, 제비뽑기라도 해야 하나, 그 자리에 서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얼핏 보면 먹고 싶은 게 없어서 저러는가 싶어 보일 정도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넌 왜 싫은 게 없냐고. 왜 다 좋다고 하냐고.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싫은 게 없는 게 이상한 일이야? 싫은 게 없을 수도 있지. 다 좋을 수도 있지. 그리고 나도 싫어하는 거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대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그렇지.’
◎ 뱀, 악어, 박쥐를 먹을 수 있을까.
퍼센트로 따지자면 98프로 정도는 되는 것 같은 대부분의 식재료를 먹는다. 나머지 2프로는 아직 접해보지 못한 식재료, 예를 들면 ‘세계테마기행’ 같은 데서 삶아 먹고 튀겨 먹는 모습을 본 뱀, 악어, 박쥐 같은 재료다 보니 접해보지 않아서 막상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그런 식재료를 대접받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시도해 볼 것 같기는 하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박쥐를 먹을 수 있어!’라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경악할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 면전에서.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수고로움을 해주시다니, 벌떡 일어나 넙죽 절이라도 할 것 같다. 인육을 먹는 것이 아닌 이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누군가의 문화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싶지 않다. 각자의 터전에서 터득했을 삶의 지혜를 모두 존중하고 싶다.
◎ 미식가는 아니지만
육류, 해산물, 나물, 채소, 뿌리채소 등 가리는 것 없이 다 먹을 뿐 아니라 레시피에도 구애받지 않아 한식이든, 동남아식이든, 일본식이든, 중국식이든, 프렌치 식이든, 이탈리아 식이든, 미국식이든, 아프리카식이든 퓨전이든 어떤 레시피라 해도 기꺼이 맛있게 먹는다. 간장에 고춧가루를 뿌려먹든, 고기를 크림에 찍어 먹든, 요구르트에 밥을 말아 먹든, 소갈비찜에 소주를 넣든, 청주를 넣든, 와인을 넣든 어떤 레시피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파스타에 고추장을 넣든, 된장찌개에 크림을 넣든 개의치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은 역시 미식가라고는 할 수 없다. 맛없는 음식이 없기 때문. 어떤 레시피로 만든 음식이라 해도 전부 맛있다.
식사 자리에서 굳이 눈살을 찌푸려야 한다면,
식당에서 맨발을 의자에 올려놓고 밥을 먹고(실제로 봤다),
밥 사는 사람 앞에서, 또는 함께 먹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잊은 채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냐고 불평하고,
입에 음식을 잔뜩 넣고 밥알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쩝쩝거리며 밥을 먹고,
같이 먹는 음식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먹지도 못할 반찬을 잔뜩 퍼 담아 와서는 먹지도 못하고 다 남기고,
종업원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희열을 느끼고,
그냥 넘어갈 일도 꼬투리 잡으며 공짜 바라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도 종업원 불러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날 잡았다.’ 하고선 꼬박꼬박 따지며 화나게 한 사람 대신 상관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컵에 휴지며 쓰레기를 잔뜩 쑤셔 놓고,
외부 음식 쓰레기를 놓고 가는 그런 행위들이 아닐까.
이런 행위들에 비하면 기상천외한 레시피쯤이야 얼마든지 아무렇지 않게 수용할 수 있다.
◎ 세 가지 소원
육아와 양육을 할 때 단계별로 소원이 있었다.
첫 번째 소원은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자보는 것
두 번째 소원은 제발 이 아이들이 빨리 커서 스스로 머리 감고 씻었으면 하는 것.
세 번째 소원은 내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며 먹는 것
세 가지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오래전 일인데도 아직도 소원의 간절함이 생생히 기억난다. 내 간절함이 어딘가 닿았는지 소원은 순차적으로 모두 이루어졌다.
세 번째 소원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금비와 효자 아들이 편식을 하지 않았으면 해서 꽤 오랫동안 식습관 형성에 공을 들였다. 식사 중에는 아이들이 반찬을 골고루 먹는지 내심 살피느라 신경이 아이들의 입에 가 있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지만 “버섯 좀 먹어 봐. 부지깽이나물도 먹어 봐.”라고 참견하기도 했다.
금비와 효자 아들이 이 땅에서 나는 여러 가지 식재료의 맛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들이 편식을 하든 말든 내버려 둘 수 있었지만 가능하면 다양한 식재료의 개성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익숙하지 않은 레시피에 거부감을 보이기보단 흥미를 갖고 궁금해 하기를 바랐다.
내가 알고 있는 레시피와 다른 방식으로 요리를 하는 걸 보고 “그걸 그렇게 하면 어떻게!”라고 타박하기보다는 “그렇게 해도 되는구나!”라고 포용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인지, 개인적인 성향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양한 식재료와 레시피를 수용한 편식 없는 식습관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계를 맛보게 해줄 거라는 것은 알았다.
이제는 아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다니.
◎ 효자 아들이 볶음 우동을 만들어 주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효자 아들이 점심으로 볶음 우동을 만들어 주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내 입맛에 맞게 직접 만들어 먹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쾌락보다 작지만 확실한 만족감을 준다. 효자 아들이 만든 볶음 우동은 일본식 볶음 우동인 야끼소바와 비슷한 듯 다른 맛. 일본식 볶음 우동이 달콤한 데리야키 향이 나는데 반해 효자 아들이 만든 볶음 우동은 좀 더 한국인의 입맛에 촥 감기는 맛이 난다. 한식 정체성의 굵직한 획을 담당하고 있는 마늘과 고춧가루와 한국 간장 때문인듯싶다.
“정말 맛있는데!”
금비도 나도 감탄하며 먹었다.
“두 그릇이라도 먹어치울 수 있겠어!”
어찌 된 일인지 이 훌륭한 요리를 만든 장본인인 효자 아들은 맛을 음미하는 듯 맛있게 면을 흡입하는 듯싶다가도 뭔가 아쉬운 듯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곧 짧은 생각에서 나온 효자 아들이 말했다.
“언젠가 아빠도 해줘야겠어.”
◎ 누군가의 간절함과 노력과 성취에 박수를
파리 올림픽을 보느라 러닝머신에서 내려오질 않고 50분이나 걸었는데 지루한 줄도 모르고 모니터 속 선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다리가 아픈 줄도, 힘든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제 자정 넘어서까지 티브이 앞에서 응원했는데 우리 선수들 메달 따는 경기는 또 봐도 재밌잖아!!!
선수들이 경기하는 것을 보며 내가 20-30대였을 때보다 요즘 더 뭉클하고 웅장한 기분을 느낀다. 금비와 효자 아들 또래의 선수들이 오랜 시간 묵묵히 고된 훈련을 견뎌냈다는 것이 대단하다. 당장의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자기 긍정을 하며 기다리고 준비해왔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그에 비하면 고작 몇 킬로미터를 걷고, 몇 킬로그램의 아령을 들고, 저녁을 굶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타인의 간절함과 노력과 성취를 일찍 알아챘다면 더 큰마음으로, 더 겸손한 따스함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텐데. 질투와 시샘 대신 “고생했다.”, “잘했다.”라고 말해주었을 텐데.
<효자 아들 볶음 우동 만드는 법>
▽재료(3인분):
- 냉동 우동 면 3개
- 양파 작은 거 2개
- 당근 1개
- 쪽파 3개
- 부추 5가닥
- 식용유 3-4스푼
- 다진 마늘 크게 한 스푼
- 마요네즈
(소스)
- 간장 3스푼
- 쯔유 3스푼
- 굴 소스 3스푼
- 설탕 1+반 스푼
- 고춧가루 1+반 스푼
- 참기름 3스푼
▽만드는 법:
- 당근 채 썬다.
- 양파 채 썬다.
- 쪽파, 부추 4-5cm 길이로 자른다.
- 재료 준비하는 동안 물 끓인다.
- 물이 끓으면 냉동 우동 면을 넣고 우동 면을 살짝 익혀준다.
- 팬에 식용유를 넣고 다진 마늘, 양파 넣고 볶는다.
- 양파가 살짝 익으면 당근과 소스를 2/3 넣고 당근을 익힌다.
-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우동, 쪽파, 부추, 남은 소스를 넣고 당근, 양파와 함께 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