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기 후에 오는 것들
◎ 나는 아무리 해도 살이 안 빠져.
10킬로그램 체중 감량에 성공하고 나니 만나는 사람들이 살 빠진 것을 알아본다. 그들이 단번에 알아볼 만큼 내가 살이 꽤 쪘었나 보다. 며칠 전에는 갑자니, 뜬금없이, 효자 아들 금조와 케이가 이렇게 말했다.
“살 정말 많이 빠졌네!”
(살 빠진 지가 언젠데!)
며칠 전에는 지인들과 점심 모임이 있었는데 역시나 살 빠졌다고 칭찬을 한 가득하시더니, 딱 보기 좋게 뺐다며, 그러니 이제 그만 빼라고 당부하셨다.
(다이어트 이제 안 한다니까요. 하하하)
그러면서 물으셨다. 살 어떻게 뺐냐고, 자신은 아무리 해도 더는 빠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그분을 찬찬히 보았다. 나도 같은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딱 보기 좋으신데요. 더 안 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진심이다. 아, 남한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팍팍한 우리란 사람들.
◎ 왜 아무리 해도 체중이 줄지 않을까?
체중 정체기가 있다. 체중이 늘지도 줄지도 않는 시기. 여느 때와 다를 거 없는 식습관, 운동량을 유지했는데도 체중 감소가 (거의) 없는 시기. 나의 경우는 11월이 그랬다.
<가설을 세워봤다.>
가설 1. 질병관리청의 권고안 6개월에 10% 감량을 달성해서?
나는 5월 69.5킬로그램에서 11월까지 약 6개월 동안 7킬로그램을 감량했다. 체중의 10%를 감량한 것이다. 감량된 체중에 적응하고 다음 단계로 가기 전의 숨 고르기 단계인지 모른다.
가설 2. 내 신장, 골격에 적합한 적정 몸무게로 들어왔기 때문?
69.5kg에서 62kg까지는 순조롭게 체중 감소했다. 더는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체형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신비로운 상상.
가설 3. 신체 월동 준비? 겨울이 오기 전 체내 지방 저장?
가설 3-1. 여름보다 땀을 안 흘려서?
가설 4. 8월 넷째 주 –9월 다이어트 일탈, 10월 둘째 주부터 다이어트 재시작하면서 몸의 혼동?
가설 5. 40대 여성 신체 호르몬 불균형?
보이진 않지만 40대 여성의 호르몬 분비는 갱년기를 앞두고 대혼란 상태인 것 같다. 배란일 즈음, 생리 전 즈음 체중 증가, 또는 체중 감소 없음.
--->루틴대로 저녁 금식, 운동하면 1-2주쯤 뒤에 체중이 쑥 내려가긴 함. 신경 쓸 일 아니라고 마음을 잡아본다.
가설 6. 지방이 빠지고 근육량 늘어서?
자신은 살 안 빠진다고 말했던 지인은 아침저녁, 하루도 운동을 빼놓지 않는 운동인이다. 식습관도 좋고, 운동도 많이 하는 그녀가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근육량 때문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녀가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는 근육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보기 좋은 단단한 체형으로 살을 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설 7. 골격이 있어서? 뼈 무게 기본 값이 있어서?
신체는 지방, 근육, 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골격 무게는 줄일 수 없으니까. 빠져야 하는 지방은 빠질 만큼 빠졌고 더는 줄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 아닐까?
가설 8. 표준 체중에 근접했기 때문?
뼈대 있다 소리 좀 듣는 내 표준 체중은 약 61킬로그램.
표준체형 또는 60kg 아래로 내려가 마른 체형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새삼, 이십 대 때 50kg으로 살았던 것이, 그때는 몰랐는데 대단히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절했구나, 나 자신. 세상 통뼈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뺀 것이야? 뼈와 살 거죽만 남기고 다 빼 버렸었구나, 스물한 살의 나.
가설 9. 오래된 체중계?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종종 체중이 다르게 표시된다. 미스터리한 점은 나한테만 그런다는 것.
가설 10. 이 방식, 이 식습관, 저녁 금식, 운동 유지해도 체중은 감소할 것?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예를 들어 한 달에 0.1-0.5킬로그램 정도?
모르겠다. 알 수 없다. 하던 대로 하고 있었을 뿐인데, 뭔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정체기가 와 버렸다.
<어떡하지?>
다이어트 방법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운동량(활동량)을 더 늘려야 하는 걸까? 하루 한두 시간 운동 외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역시 운동량을 늘려야 하는 걸까? 주말 운동을 추가해야 할까?
음식 섭취를 더 줄여야 하는 걸까? 이제, 주말 저녁 금식도 해야 하나?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걸까? 군것질을 완전히 끊어버릴까? 달달한 음료수 한 잔도 마시지 않아야 할까?
◎ 삶에도 정체기가 있다. 잘못하지 않아도 정체기가 있다.
다이어트에만 정체기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나는 지금 정체기 구간을 지나고 있다. 올해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생각이 구체적으로 많아졌다.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나는 여전히 40대다. 꽤 빠르다. 아이를 두 명 낳아 기르면서 지금까지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올해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내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더는 들지 않는다. 이제 아이들은 어엿한 성인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거라고 믿는다.
나도 이제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 케이의 든든한 보호자로서, 언제나 아이들을 응원하는 지지자로서 힘을 내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의 보살핌을 받는 연약한 아내가 아니라, 남편만 붙잡고 있는 나약한 아내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공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을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 엄마가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셔 지켜주고, 응원해 주는 든든한 존재로서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행복해야 한다. 별거 아니어도.
웃어야 한다. 별일 없어도.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웃는다면 가족들도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 잘 살고 있구나, 안심하지 않을까. 세상이 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
◎ 정체기를 어떻게 보낼까?
정체기는 변화의 직전 단계이다. 인생의 정체기 구간을 지혜롭게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 정체기 구간을 지났을 때 내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본다.
정체기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정체기가 지나면 멈춰 있던 신장은 약간 줄어들 것이고, 체중은 다시 증가할지도 모르고, 크고 작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케이는 은퇴할 것이고, 소득은 감소할 것이다. 저성장과 하이 인플레이션으로 더는 평범한 중산층이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앞으로 무얼 하지?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40대에 찾아온 인생의 정체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 고 생각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 매일 꾸준히 걷는다.--->하던 거
- 밥이 보약이 되는 식사를 한다.---> 하던 거
- 봉사활동을 한다.--->하던 거
- 좋은 사람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하던 거
- 명상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하던 거
◎ 정체기가 와도 여전히 나아갑니다.
하던 대로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도 꿋꿋이 하던 대로 한다. 멈춘 것처럼 보여도, 나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멈춘 것 같은 다이어트 정체기를 지나고 10kg을 감량해서 다이어트를 마쳤듯이 40대에 맞이한 인생의 정체기를 잘 보내고 나면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이어트 정체기보다 길고 두터운 인생의 정체기, 너무도 막연한 정체기, 하루하루 잘 보내야지, 생각한다.
이왕 태어난 김에, 이왕 사는 김에, 이왕이면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해로운 사람보단 나은 사람으로, 위선이라고 해도, 가식이라고 해도, 이왕이면 좋은 일을 한 가지라도 하며 살고 싶다. 그러면 정체기를 지났을 때 최소한 만족스럽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