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때 엄마는 지금의 나였다.

이제야 이해하게 된, 엄마의 그날

by 비단구름

▣ “구름아, 엄마 봐라. 배 나온다.”


"구름아, 엄마 봐라. 배 나온다."


엄마가 이 말을 했던 건 지금 내 나이쯤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안방에서 옷을 입고 있었고 나는 그 곁에 편하게 늘어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말고 약간 나오고 쳐지기 시작한 배를 보여주며 민망하다는 듯 웃던 내 나이 즈음의 엄마.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몹시 젊었던 엄마 얼굴과, 맞은편에서 엄마 말을 들으며 엄마의 배를 보며 배 나오는 게 대수로운 일인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금비 나이쯤의 내 모습은 한 장면처럼 박제되어 머리에 남아있다.


금조가 내 외모가 어떻듯 상관없다 하듯, 나도 엄마의 외모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살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엄마.

날씬하든, 뚱뚱하든, 예쁘든 안 예쁘든. 멋쟁이든 아니든.


엄마로도 살아보고 자식으로도 살아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식이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부모가 자식에 대해 이런저런 꿈을 꾸고, 이런저런 기대를 하는 거에 비해 자식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딱 하나인 것 같다.


‘엄마, 아빠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는 것.’


자식은 부모의 경제력을 크게 바라지 않고, 부모의 학력 수준을 바라지도 않고, 부모의 외모에 대해서도 평을 하지 않는다. 부모 노릇은 처음이라며 하는 많은 실수도 자식은 매번 이해하고 받아준다. 그리고 부모를 걱정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부모를 공격했다는 기사를 접하면 ‘저놈의 자식’이라고 욕을 하기보단 그렇게까지 된 지난 시간들이 읽혀 마음이 아팠다.


9-1.jpg 10kg 감량한 일반식 다이어트


▣ 그땐 몰랐던 엄마의 여름


문득문득 자동 재생되는 엄마와의 많은 날들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다. 햇살이 환한 초여름 날 같은 날들에 엄마가 있다. 엄마는 때론 마룻바닥에 앉아 학습지를 풀고 있는 내 옆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고, 손을 잡고 시장을 가기도 한다. 봉선화를 빻은 뒤 손톱에 올려 비닐봉지를 자른 뒤 실로 손가락 하나하나 묶어주기도 한다. 엄마와의 날들은 늘 여름이다.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한 번씩 눈앞에 재생되곤 하는 필름 속에서 "구름아, 엄마 봐라. 배 나온다." 하던 그날 의 장면도 분명 여름인데, 유독 이 장면에선 여름이 곧 끝날 것 같은, 여름이 가고 바로 11월이 올 것 같은 겁이 난다.


엄마의 시간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갈수록 날씬한 멋쟁이 엄마는 희미한 기억이 되지만, 사진 속에는 분명히 젊은 날의 엄마가 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날씬한 엄마.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단발 헤어스타일을 하고선 여신처럼 웃고 있는 엄마. 뱃살은커녕 며칠 곯은 사람처럼 납작하고 홀쭉한 배속으로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집어넣고 진청바지를 입어도 힙하게 말라 맵시가 줄줄 흐르던 삼십 대의 젊은 엄마.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쁘다고 칭찬 일색이었던 아름다운 엄마는 나의 무심함 속에 멀어지는 젊음의 뒷모습을 혼자 바라보고 있었다. 안티에이징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저속 노화라는 말도 없던 시절,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늙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에도 몹시 미인이었던 엄마는 성큼 다가온 노년이 두렵고, 외로웠을 것이다.


시간이 순삭 하고 지나 먼 훗날일 줄 알았던 일이 어느새 데자뷔처럼 내 일이 되어버렸다. 체형을 흐트러뜨리는 엄마의 뱃살이 평안하고 잔잔한 일상을 흔드는 균열 같은 사건이었다는 것을 툭하면 배가 튀어나와 버리는 40대의 나는 비로소 깨달아 가고 있다. 제아무리 별 난 것 같고, 잘난 것 같고, 특별한 것 같아도 결국 우리는 끝에 가서는 유사한 꼴로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천진스러운 웃음인 줄 알았던 “엄마 배 봐라.” 하던 엄마의 배를 보며 ‘그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했던 무심함은 외적으로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던 엄마의 당혹스러운 감정에 공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였다.


9-2.jpg 운동&체중변화


▣ 엄마의 배는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다.


엄마의 다이어트는 의지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다. 다이어트로 10kg을 감량하고 그럭저럭 체중을 유지하고 있지만 배 관리는 번거롭다. 하루 이틀만 방심하면 배가 도로 나와 버린다. 며칠만 게으름을 피우고 자세를 풀고 편하게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배가 옆구리까지 흘러넘쳐버린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벽하게 금식했다고 할 수 없는 저녁 금식.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칼로리 걱정은 잊고 고기 몇 점, 메추리알 두세 개, 오징어 두 조각, 찌개 국물 몇 숟가락 간을 본다.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이 젊은 날의 몸매를 잃는 것보다 큰 소소한 행복이다.


엄마의 다이어트는 게으름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다. 엄마는 나만 생각할 수 없다. 엄마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 엄마는 가족과의 식사 시간이 즐겁다. 마른 엄마들의 체형이 다이어트의 결과라고 볼 수만도 없다. 엄마는 바쁘다.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한다. 성장하는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양보한다.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엄마의 다이어트는 쉽지 않다. 옛날엔 꽤 날씬했었는데, 꽤 괜찮았었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젊었을 때 입었던 날씬한 옷을 볼 때마다, 없어진 몸매와, 굵어진 허리를 볼 때마다 엄마는 속상하다.


엄마는 나를 보면 “우리 딸 예쁘네.” 하신다. 어쩌면 엄마는 지난날의 젊음에게 뒤늦은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다정한 눈빛 속에서 나를 통해 마주하고 있을 엄마의 젊은 날과 눈 맞춤을 한다.

keyword
이전 08화쌀 20kg을 드는 여자, 나는 오늘도 잘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