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하게, 씩씩하게, 단단하게
▣ 처음 출산했을 때의 오만가지 기분
처음 출산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기차가 배 위로 지나가는 기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기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너덜너덜해진 기분.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뼛속부터 확인하는 기분.
막 태어난 핏덩이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선 내 가슴에 의지한 채 금방 꺼질 것 같은 가냘픈 숨을 쉬는 걸 보는 기분.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작고 연약한 아기에게서 생명의 존엄을 배우는 기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는 기분.
내 자식이라는 존재가 생긴 기분. 나를 죽도록 아프게 한 존재에게 첫눈에 반하는 기분. 제 앞가림도 못하는 내가 작고 약한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비장한 기분. 어쩌자고 엄마 노릇을 해본 적도 없고, 내 것을 다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엄마가 되다니, 삼신 할멈이 갑자기 떠오르는 기분. 이 소중한 존재의 엄마가 되게 해주신 신께 무한 감사한 기분.
작고 작은 아이에게 큰 사랑을 받는 기분.
거룩한 기분과 별개로 체형의 변화를 실감하는 기분. 가슴부터 뱃살, 엉덩이, 팔뚝, 등살, 등짝의 가죽의 질이 전부 변해버려 출산 전 입었던 옷을 입어도 예전 맵시가 나지 않는 나를 보는 기분.
살은 빠져도 체형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는 기분. 싱그러움을 영원히 잃은 기분. 볼살이 사라진 움푹한 자리에 엄마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분. 변하지 않은 것은 출산 전 입었던 옷뿐.
▣ 엄마의 사랑으로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내가 임신할 때마다 엄마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나는 금비와 금조 모두 엄마가 몸조리를 해주셔서 산후조리원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우리 효자 아들 금조가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어릴 때는 양력 썼어? 음력 썼어?”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응, 우리 할머니의 엄마 때도 양력 있었어.”
금조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금비와 금조를 낳을 때 산후조리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안의 첫째인 나는 남들 하는 거 하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았다. 밥 잘 먹고, 건강하고, 잘 뛰어놀고, 왔다 갔다 학교 잘 다니고,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교, 대학교 졸업하면 취직, 직장 좀 다니다가 결혼, 결혼하고 첫째, 그다음 둘째. 특별할 거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하는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집안의 첫째였던 나는 평범한 것을 이탈하지 않고 해내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았다.
엄마는 몸조리는 무조건 친정에서 하라고 하셨다.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금비와 금조를 보살펴 주셨고 나에게 삼시 세끼 미역국을 끓여주시며 회복을 도와주셨다. 엄마가 말하는 회복이라는 것은 한국식 몸조리. 한국 사람은 한국식으로 몸조리를 해야 나중에 늙어서 손목이며, 뼈마디며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미역국에 밥 말아서 한 사발 먹고 따뜻한 방에서 몸 지지며 누워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몸조리 끝나고 집에 가면 실컷 고생한다면서 친정에 와서 몸조리하는 동안 푹 쉬라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하시며 상전 대접을 해주셨다. 결혼을 일찍 하고 아이를 빨리 낳은 탓에 금비, 금조의 몸조리를 해주실 때 엄마는 오십 대였다. 집안의 첫째로 태어난 나는 집안의 모든 혜택 중 최고의 혜택인 엄마의 지극정성을 다 누린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체력 회복에만 신경을 쓸 수 있었다.
▣ 여자에서 엄마로, 다시 여자로
내가 금비를 낳고 기르던 시절엔 이런 말이 돌았었다. 임신 때 찐 살은 출산 후 일 년 이내에 빼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체형이 굳어진다고.
요즘 산모들은 출산 후 체력 회복과 동시에 출산 전 몸매 회복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출산 후 몸매 회복을 위한 요가, 필라테스 등 다양한 운동으로 출산 전의 몸매를 회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애쓴다. 엄마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젊은 날의 나를 놓지 않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하루 두 끼만 먹고, 요가, 필라테스, 러닝을 등 자기관리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 몸이 달라졌다, 마음도 달라졌다.
애를 써도 살이 슬금슬금 오른다. 날씬했던 허리 라인이 점점 사라진다. 중력과 육아와 집안일을 하면서 사용한 근력의 작용으로 체형이 빠르게 변했다. 금비와 효자 아들을 업고 안고 다니면서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가녀린 몸통은 케이와 금비와 효자 아들이 모두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스럽게 굵어졌다. 해 질 녘까지 집 근처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손으로는 놀다 지친 아이를 안고 남은 손으로는 자전거를 들고 이동하는 동안 가늘기만 하고 기능이라곤 없던 팔뚝은 무쇠 팔뚝으로 굵어졌다. 모양만 있던 작고 매가리 없는 손가락은 솥뚜껑을 때려잡을 만큼 굵어져서 결혼반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출산 후 남아 있는 탄력 없는 은밀한 뱃살은 죽을 때까지 안 들어갈 거 같다.
그래서, 우울하냐고?
꽤 튼실해진 지금의 나도 괜찮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내가 만족스럽다.
▣ 나는 우리 집을 지키는 대장군이다.
나는 튼실한 내 모습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 가족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함이 마음에 든다. 가족을 지키려면 호랑이 기운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출산과 육아를 하지 않았어도 중력과 노화의 법칙으로 지금 이 모습일 거 같다. 중력을 거스를 순 없는 거니까. 노화를 거스를 순 없는 거니까. 20대처럼 50킬로그램이 되어도 20대 때와는 다른 외모, 다른 몸매일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50킬로그램까지 빼겠느냐며, 나는 오늘도 인생 다 산 사람 같은 소리를 하며 만족 중이다.
20kg 쌀, 적어도 10kg 쌀을 다용도실에 옮겨두는 체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2L 생수 6개 묶음 양손에 한 묶음씩 들고 이동하는 것이 엄마는 더 중요하다.
힘이 있으면 사는 게 편하다. 체력은 국력, 체력이 가정을 지키고 나를 지킨다. 나는 우리 집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집을 지키는 대장군이다. 언젠가 케이가 말했다. 너가 든든하게 집을 지켜주어 자기가 밖에서 맘 놓고 일한다고. 나는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집을 지키는 대장군이다.
단단하게 살 거다. 힘 있는 사람으로 살 거다. 기운 있는 사람으로 살 거다. 백두대간을 호령하던 호랑이처럼 호랑이 기운으로 씩씩하게, 지치지 말고 다정함을 나누어주며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