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인지
만약 당신에게 말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말의 어떤 모습을 그릴지 생각해 보라. 대다수는 서 있는 말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신에게 말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릴까? 서 있는 말보다 역동적인 말을 그리기는 더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동적인 말이 보여주는 특징이 머릿속에 없거나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다수는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고, 있다 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몇 번 본 게 전부일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명한 발명가이자 화가인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보면 아마 누구나 감탄할 것이다. 움직이는 말의 특징을 아주 명료하고도 세밀하게 그렸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습작을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습작은 그가 긴 시간 동안 말의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고 조금씩 그 특징을 종이에 옮기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움직이는 말의 모습을 그리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먼저 움직이는 말을 반복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통해 말의 움직임을 잘 나타내는 특징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가 명료하게 인지한 말의 특징은 머릿속에 저장된 후, 그는 머릿속에 저장된 말의 특징을 종이에 그렸을 것이다. 여기서 머릿속에 있는 움직이는 말의 모습에 관한 특징은 앎 혹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평소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없거나 말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한 적이 없는 이가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그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신의 기억 속에 그 특징에 관한 정보가 없으므로 그리지 못하거나 엉성하게 그릴 것이다.
만약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역동적인 말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릴까?
만약 그가 기억력이 좋다면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그려낼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앞에 두고 반복해서 그리는 훈련을 오랫동안 한다면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계속 그렇게 연습한다면 어쩌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보지 않고서도 역동적인 말의 그림을 잘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과 똑같이 그려낼 수 있다면, 그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인지 능력의 차이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움직이는 말의 모습에 관한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인지하였다. 이 과정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보면서 그리기 훈련을 한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직접 움직이는 말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특징을 잡아내는 인지 능력이 발달하였기에, 움직이는 다른 대상을 그릴 때도 그 인지 능력은 작동한다. 이에 반해 레오나르드의 다빈치 그림을 보고 그리는 훈련을 한 사람은 그런 인지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지닌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유명한 예술가의 창의성은 바로 인지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 삶의 주체로 작용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마음에 관해 배운 적이 없거나 깊이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마음에 관한 지식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은 타인의 책이나 전문가를 통해 말과 글을 통해 습득한 것이다. 따라서 그 지식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보고 베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지식은 대체로 하나의 앎으로 작용할 뿐이다.
명상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을 대상으로, 세밀한 구조와 특성을 직접 인지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움직이는 마음을 인지하는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바로 관찰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움직이는 말을 대상으로 관찰한 것처럼, 명상은 움직이는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말의 특성을 인지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으로 관찰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마음 역시 그 이상의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명상은 관찰형 배움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