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북씨어터에서 책 <생의 한가운데>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함께 보았다.
삶은 누군가에겐 환희이고 행복이고 고통이거나 극복이다. 점이거나 선이다. 지향이거나 성취이거나 상실이다. 마츠코와 니나의 삶을 무엇으로 의미지을 수 있을까.
두 작품이 왜 엮였는지 이해하는 과정부터 내겐 고난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니나이고 싶었던 적은 많았는데 마츠코를 보면서는 몇 번이고, 절대 마츠코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나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살아가겠단 의지도 강했지만 세상에 자신을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수단으로 쓰는 사람에 이입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이에게 갖는 경외감이 있다. 그런 막연하고 섣부른 감정으로 나는 니나이고 싶었던 것 같다.
p29 "행복에 겨울 때에는 죽어도 좋은 건지도 몰라.
그렇지만 역시 그것도 다른 모든 일과 다를 바 없이 비겁한 일일 것 같군"
행복하기만 해도 충분한데 왜 굳이 고단하게 현명해야 하느냐고 작가는 니나의 입을 통해 질문하기도 한다. 그 질문은 고단하더라도 현명해야한다는 답이기도 하다. 자신 이외의 것을 위해 자신을 소진하겠다는 스스로의 욕망은 그것을 '소모' 대신 '기여'로 부르게 한다. 정의로운 생각을 갖는 것과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그녀는 자신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세상에 기여한다. 나치즘에 반대 목소리를 드높이고, 망명하는 이들을 돕는 부분이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역시 니나는 결연한 자신만의 생의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본인의 삶의 방향과 방식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선명하다. 자살시도를 한 후에도 '죽어갈 때 생의 욕구를 강렬히 느꼈다'고 얘기하는 저 자신감을 어쩜 좋으리오 하는 심정을 갖는 것 이외에 그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누구나 살고 싶어하지만, 왜 살고 싶은지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상기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제 뜻과 맞다면 어디로든 부딪히고 깎여나갈 각오가 돼 있는 짱돌 같았다. 그녀의 도도 당당 확신에 찬 태도를 보며 '나'는 안도감, 열등감, 염려, 연민, 질시, 안타까움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에 여러 번 휩싸였을 것이다.
반대로 마츠코는, 연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자꾸만 소모되는 지우개 같았다. 상처와 두려움을 안고 도피하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깎여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의 삶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떠밀림'이었다. 살아간다보다 살아진다에 가깝게 느껴져 안타깝고 슬펐다. 살아진다와 살아간다를 극으로 수직선을 펼쳐놓으면 살아진다 쪽에 기울어진 삶이 우리 주변에 무척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조금씩은 마츠코다. 점차 의지와 방향을 갖고 살아내게 되는 삶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떠밀리고 떠밀리는 무책임한 삶의 태도는 자신도 주변도 모두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여럿이 얽히고 설켜 지내기 때문에, 마츠코의 삶은 마츠코 주변 사람들의 공동책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혼자 오롯이 살아갈래야 그럴 수 없고 서로에게 조금씩은 기대게 되어 있다. 아버지도 동료교사도 류도 메구미도 쿠미도 그녀와 약한 부분을 서로 치유하며 함께 살아나갈 수 있었다. 덜어내기 두려워 끌어안다 보면 무거워 짓눌리고 결국 나동그라지게 된다. 각자의 아픔을 제각기 끌어안느라 끝끝내 '우리'가 될 수 없었던 게 마음 아팠다. 개인의 약함을 내보이고 타인에게 기대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대신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가지기 시작하면 그들이 함께 지탱하는 삶을 향한 힘은 그들 개인의 합 이상으로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기대지 않아 허물어지곤 했던 니나도, 기댈 줄 몰라 나부끼고 흩어졌던 마츠코도 모두 애처로워지는 구석이 있다.
생에의 의지는, 다른 이의 삶이 내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다고 여길 때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서로서로 기대고 있다고 생각해야 더 강하게 발을 딛고 선다. 그리고 그런 합의가 서로에게 있을 때, 때때로 지쳐 내 다리에 힘이 빠지는 순간에도 안도할 수 있다.
p130 그녀는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나는 그 용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자신을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반한 한 남자의 열렬한 사랑과 비뚤어지기도 했던 욕망은 너무 절절해서 딱하기까지 했다. 슈타인에게 화가 날 적도 있었지만 읽을수록 수그러들었다.
사랑은 약해지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동시에 굳건해지게 하고 도전하게 한다. 정의하기에 너무나 복잡한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일면이기에, 사랑을 대하는 누구에게도 네 방식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 나와 잘 맞는다, 나와는 다르다 정도라면 모를까.
책을 읽으며 사랑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댔지만 사랑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하겠다. 슈타인이 니나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내가 생각하는 광의의 사랑을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고 있다.
p273 넌 늘 내가 어둡고 출구도 보이지 않는 긴 복도를 지날 때 문을 열어주었고 내게 가까이 와 햇빛이 찬란한 들판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들판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의 극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이런 말을 누구에게든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마츠코는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면에서 마츠코인 내 주변 누군가들을 떠올려본다. 나에겐 그를 건져올릴 힘이 있다. 조각의 말과 작은 마음으로도, 나는 누군가의 생의 의지를 적실 수 있는 존재다. 우리 서로에게 존재,가 되어주자.
2017.02.13. 북씨 독후감. 생의 한가운데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예전 독후감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지금이라면 꽤 많이 다른 입장의 글을 쓰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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