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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Feb 25. 2023

나의 첫 제자들로부터

사범대생에게 첫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보통 4학년 1학기에 중학교나 고등학교 학교현장에 나가 한 달 정도 실습을 하는 교육실습생 기간에 맡은 반 아이들이라고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더러는 학원에서 보조교사로 알바를 하며 만난 아이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3학년이었던 2019년 봄부터 겨울까지, 약 일 년 동안 서울 내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만난 두 아이가 첫 제자들이었다. 


교육봉사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수요일 지역아동센터 1층 교실에서 진행됐고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A와 B의 영어 과외를 맡았다. 원래 내 전공인 국어과목을 맡고 싶었지만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영어나 수학을 가르쳐 주길 원했고, 그래서 좀 더 호감인 영어를 하겠다고 했다. 여학생과 남학생 중엔 여학생이길 바랐는데, 영어실력 향상은 물론이거니와 오순도순 얘기도 나누고 고민상담도 해주는 좋은 언니가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웬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남학생이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어쩔 수 없지, 뭐. 좋은 누나가 되기로 했다.


수업은 학교 교과서를 가지고 예습 및 복습을 하면 되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조금 놀랐던 건 교과서가 내가 중학생 때 썼던 것과 표지 하나 달라지지 않고 똑같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본문 내용과 학습활동의 지문까지 그대로였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교 교실에서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씁슬함과 묘함 감정을 느꼈다.


A와 B는 성향이 정반대인 아이들이었다. A가 얘기하기를 좋아하고 농담을 잘하는 스타일이라면, B는 과묵하고 진중한 스타일이었다. A가 열 마디를 할 때 B는 한 마디를 했고, A가 공부 대신 땡땡이를 치고 싶어할 때 B는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A가 혼자 신나서 끊임없이 얘기를 할 때면 B는 자기만의 굴을 파 들어갔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가감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고, 그럴수록 나는 두 아이의 중간지점에 수렴하기 위해 어지간히 땀흘려야했다.


하루는 수업을 하다가 잠시 쉬어갈 겸 아이들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너희는 어떤 일이 하고 싶어? 학교 졸업하고 하고 싶은 일 있어?"

내가 묻자 B가 주저하는가 싶더니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구두 디자이너... 하고 싶어요."

"구두 디자이너?"

"네. 부모님이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시는데 저도 동대문에서 구두 디자인해서 팔고 싶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A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구두 디자이너? 그런 일 하면 너 이 바닥 못 벗어나.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냐?"


동대문은 A에게 '바닥'이었고 '벗어나야 하는 곳'인 것 같았다. 더 놀라웠던 건 A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익숙한지 B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일언반구도 없었다. 속으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런 내색을 숨기고 A에게 물었다.


"음, 그럼 A는 어떤 일 하고 싶은데?"

"쌤 발명고 알아요? 발명하고 특허 배우는 학교인데 전 여기 갈 거예요. 여기밖엔 길이 없어요."


16살 아이의 눈엔 길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했고, 22살 선생의 눈엔 A가 걸어가야 할 외나무 다리가 보였다. 어쩌면 일찍 자신의 진로를 찾고 선택하는 것이니 A가 말한 것처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미생>의 한 대사처럼 회사 안은 전쟁터고, 밖은 지옥이니까. 전쟁과 지옥 속에서 살아남는 건 A처럼 일찍 세상 물정을 알고 움직이는 자일지도. 그러나 인생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마주오는 사람을 밀쳐내고 가야하는 천길 낭떠러지 시합이 아니라는 걸,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살아가기엔 인간에게 허락된 이 삶은 생각보다 길고 공허함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는 걸, A는 알까? 입 안이 씁쓸했다.



이날 이후, 어느 날 A는 과외시간에 맞춰서 왔는데 B가 늦게 왔던 날이 있었다. 아이들과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는 것이 교육봉사 기관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A와 B의 연락처가 없었다. A에게, B한테 전화해서 어디쯤 왔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러자 A는 B의 연락처가 없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센터에서 같이 지내왔다고 했는데 의아했다. 왜 연락처가 없는지 물으니 A는 B가 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친구가 아니니까 연락처가 없다고 했다.


이 두 아이가 친구가 되는 걸 가로막은 건 무엇이었을까? 성격? 취향? 관심사? 혹은 가치관? 환경? 관계? 다른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났더라면 둘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마음들이 이 아이들 사이에서 오고 갔는지 함부로 재단할 순 없다. 다만 나의 첫 제자들로부터 진심이 버거워질 때가 많았고 그 상황은 나를 쓸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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