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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Nov 12. 2020

그녀는 고작 서른에 남편을 잃었다

   한동안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는 하나 뿐인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머니는 늦게까지 학원에서 원생들을 가르쳤고, 나는 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내 나이 고작 10살이었다. 아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어디서 맞고 다니지 않게 태권도 도장을 보냈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예쁜 옷을 입혔다. 돈을 벌어야 하니 당연히 시간이 없었다. 매년 운동회는 사촌누나나 친구의 도시락을 얻어먹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졸업사진도 없다. 그녀는 돈을 벌어야 해서 자식을 위해서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돈이 없었다. 이사 가는 횟수가 잦았고, 점점 집의 크기가 줄었다. 나중에는 학원 방 중 하나가 가정집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가세가 기울고 있음을 눈치 챌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학원을 번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사업 수완이 없었다. 안목이 부족해 크고 작은 사기를 몇 번 당하고, 마지막으로 있던 건물에서는 건물주에게 쫓겨났다.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매주 치킨을 먹지 않아도 되니, 운동회에는 어머니가 직접 만든 도시락이 먹고 싶었다. 유행하는 옷은 필요 없으니, 어머니만큼은 내 꿈을 응원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신학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녀는 내게 ‘너는 어떻게 돈 안 되는 것만 골라서 하고 싶냐’며 타박해서는 안 됐다. 자식에게 인생을 건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으며, 어린 아들에게 필요한 건 격려와 믿음이었다.

내 인생이 꼬인 건 순전히 부모 때문이었다. 한부모 가정으로 살기에 3살은 너무 어린 나이었다. 부모의 사랑만 받아도 모자란 나이에, 늘어나는 건 책임감뿐이었다. ‘엄마에게는 나뿐이다.’ 세상에 어떤 아이가 사춘기도 오기 전에 부모에 대한 책임감이 오겠는가. 과연 누가 내게 ‘그래도 부모 탓을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나이가 조금 더 많았으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성인이 된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무너지는 어머니를 안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참 극성인 부모를 뒀다며 웃어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나는 한참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     

‘누구나 이번 생이 처음이다.’ 한 때 유행처럼 돌던 말이다. 특히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는 드라마의 대사는 많은 불효자들의 가슴을 후볐다. 그러나 ‘처음’은 실수의 핑계가 되지 않는다. 면접관에게 면접이 처음이니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운전이 처음이라고 교통사고에 대한 처벌을 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처음 살아간다. 그래서 공부하고 연습한다. 처음이라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며, 잘못에 대한 책임이 덜해져도 안 된다. 무엇보다 부모만 처음 부모가 된 게 아니다. 자식도 자식이 처음이다. 엄연히 말해 부모는 ‘중고신입’이다. 자식이었던 적이 있고, 남편이었던 적이 있으며, 자식보다 훨씬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 왔다. 엄연히 어른으로써 살아가고 있으면서 ‘부모가 처음이니 봐 달라’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상처는 여전히 자식의 몫이다. 수많은 자식들이 내가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며 눈물 꽤나 흘렸을 테지만, 강자와 약자 중 이해 받아야 하는 건 당연히 약자지 않은가?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한동안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용서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 때쯤 언제나 부모를 ‘이해받아야 하는 피해자’로 그리는 매체들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자식은 어떤 선택권 없이 세상에 나온다. 외모도, 성별도, 성격도, 태어날 병원도, 무엇 하나 선택하지 못했다. 반면에 부모는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직업을 선택했고, 배우자를 선택했으며,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선택했다.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한동안 을은 자식이다. 그들의 어리광은 당연하다. 그야말로 모든 게 처음이지 않은가. 자식이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서 벗어나면 이제는 부모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부모에게 꽂은 비수를 곱씹으며, 또다시 을을 자처한다. 자식에게 부모는 평생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부모의 잘못임이 명백한 경우에도,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려 애 쓴다. 드라마마저 그게 옳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무감각해졌다. 용서해보려고 안간힘을 써 본 적도 있지만, 그럴수록 원망이 커졌다. 원망이 감정을 완전히 잠식하기 직전에, 나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합리적인 선택이 없었다. 억지로 용서하려 하지 않으니 전보다는 지낼 만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여전히 화는 올라왔지만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용서하지 않아도 부모자식으로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남들에게는 여전히 사이 안 좋은 가족으로 보였겠지만, 괴로운 삶보다는 외로운 삶이 나았다.

삶의 외로움은 세월이 해결해주었다. 어머니와는 가끔 통화를 하고, 여유가 되면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 정도로 만족했다. 어머니와 가까워지기 위해 용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한 사이로 몇 년이었을까. 적막이 싫어 틀어 둔 라디오에서 나온 한 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부모님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다.’ 문득 정말 그런가 싶어서 어머니와의 나이 차이를 계산해봤다. 1년 후면 나는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의 나이가 된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지 3년 후 남편을 잃었다.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이었다.

요즘 빠져 사는 의학 드라마가 있다. 극중 여인은 다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들을 무릎에 재운 채, 남편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모니터 넘어 보이는 그녀는 상당히 앳되었다. 많이 쳐줘야 서른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고, 사석에서 만난다면 서스럼 없이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로 보였다. 서른을 겨우 넘긴 나이에,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 홀어미의 자식으로 지내왔기에, 앞으로 그녀 앞에 있을 장애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애비 없이 살아야 할 자식이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드라마의 여운에서 빠져 나온 후 깨달았다. 나의 어머니는 나보다 3살 많은 나이에, 고작 서른이라는 나이에, 세상 아름답고 앳될 나이에, 남편을 잃었구나.     

*     

나는 어린 나이에 너무 큰 고난을 겪었다고 자부한다. 삶의 불행을 가지고 경쟁을 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자신이 있다. 사랑 받으며 커야 할 나이에,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에게 사랑받지 못 했다. 무엇 하나 어린 내가 견딜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했지만,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지 몰랐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것도, 남편이 죽은 것도 처음이었다. 과부라는 낙인을 버티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그녀의 손에 안긴 아이는 한없이 작았다. 분명 그 순간 가장 복이 없는 건 그녀일 텐데, 세상은 남편이 여자 복이 없다며 혀를 찼다. 세상에는 어린 과부를 위한 매뉴얼이 없었으며, 그렇게 그녀는 어린 나이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아쉽게도 아직 어머니를 용서하지는 못했다. 드라마 한 편에 사그라들 감정이었다면, 평생 응어리질 이유도 없었겠지. 그러나 조금은 어머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참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안 좋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자식에게 해소했고, 지갑에서 돈이 없어지면 무조건 자식을 의심하던 사람이었다. 아마 그 기억은 내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어머니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너무 어렸을 뿐이다. 우리의 어머니는 모두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되며, 개중에는 그 나이에 견디지 못할 경험을 한다. 아이에게 한없이 커 보이는 어머니는, 당연히 아이에게 어엿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 남짓이다.

나는 참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불행은 부당하며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정작 어머니는 당연히 넘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완벽하지 못한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나도 한없이 어렸기에 감히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살이 된다고 해서, 부모가 된다고 해서, 한순간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사람일지라도, 처음 겪는 문제는 반드시 생긴다. 어머니와의 문제는 꾸준히 나를 괴롭힐 것이고, 직장 동료, 배우자, 자식 등 나를 괴롭힐 존재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그들의 서투름에 내게 필요한 태도는 단 한 가지다. ‘그녀는 고작 서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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