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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Nov 12. 2020

힐링경쟁시대


선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갖는 것은 곤욕이다. 잔정이 많아서 쉽게 버리지도 못한다. 특히 책 선물을 반기지 않는다. 평생을 꽂혀 있어야 하는 책만큼 불운한 존재가 있을까. 덕분에 집은 버리지 못한 선물투성이다. 책장 한편에는 인봉 씰도 뜯지 않은 핸드크림이, 방 한구석에는 절대 바를 리 없는 바디로션이 놓여 있다. 가장 골치 아픈 날은 명절과 생일이다. 해마다 받아 오는 선물세트는 가뜩이나 좁은 방의 면적만 줄일 뿐이다. 가장 난감한 생일 선물은 올해 받은 즉석국 세트다. 원체 잘 먹지도 않는 국을 선물 받으니 제법 난처하다. 악의 없는 악만큼 골치아픈 게 없다.


선물을 받을 때 제일 어려운 게 반응이다. 나는 도저히 즉석국 세트를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주는 쪽은 언제나 반응을 원한다. 그것은 선물에 쏟은 정성과 비례하다. 원치 않는 선물에 편지까지 동봉되어 있다면 큰일이다. 아무리 내가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어도, 상대방의 진심에 냉소로 응하는 냉혈한은 아니다. 선물을 받을 때는 항상 기쁘게 받으려고 애쓴다.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물론 찬장에는 먹어 치워야 할 즉석국이 쌓여 있다.


혼자 살다 보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다. 아침에는 마저 자야하며, 퇴근 후에는 서둘러 쉬어야 한다. 느긋이 식사를 준비 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너무 부주의해서도 안 된다. 모름지기 식사란 맛을 우선으로 하며, 영양 밸런스까지 두루 갖춰야 한다. 그러나 나는 최선의 식사를 할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내게 최고의 음식은 배달 음식이며, 편의점 도시락이 차선이다. 어디서 반찬이라도 얻어 오면, 즉석 밥으로 대충 때우는 수준이다. 그렇게 한 끼 두 끼 넘기다 보면 무엇조차 먹을 수 없을 때가 온다. 몸은 지쳐 요리를 할 수 없고, 배달을 시키기엔 지갑이 가벼운 시기가 온다. 그 때 포장도 뜯지 않은 즉석국이 내 눈에 들어 왔다.


요즘 시대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나는 단연 ‘각박한 세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입시, 학점, 취업 등 경쟁은 세상을 각박하게 만든다. 한 때 대세 예능의 유행어는 ‘나만 아니면 돼’일 정도로, ‘각박’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까. 각박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위로를 찾는다. 어느 날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더니, 점차 힐링을 좇기 시작한다. SNS에는 힐링거리 투성이다. 좋은 여행지에서, 유명한 맛집에서, 예쁜 카페는 좋은 힐링거리다. 그들은 위로를 받기 위해 멀리 투어를 떠나며, 사람들은 화면 너머의 위로를 욕망한다.


누군가의 취미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나 역시 지친 삶을 위로 받기 위해 종종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노력이 위로 받기 위한 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경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위로 역시 경쟁거리다. 누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지, 누가 더 예쁜 카페를 방문했는지, 누구의 위로가 더 위대한지 겨룬다. 바야흐로 위로 경쟁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나은 위로를 받기 위해, 자신이 받은 훌륭한 위로를 자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로받기 위해 노력하는 삶만큼 불쌍한 삶이 있을까. 이미 받은 위로마저 알지 못하는 삶만큼 불행한 삶이 있을까.

나는 즉석국을 대단한 선물로 여기지 않았다. 국을 잘 먹지 않는 나에게는 버리지 못하는 짐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을 때, 즉석국은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를 견뎌냈다. 위로란 그런 것이다. 직장 동료가 건네는 청포도 사탕에, 매일 어머니가 해주는 계란 후라이에, 친구가 사 온 맥주 한 캔에 위로가 담겨 있다. 우리는 종종 외로운 인생을 토로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음미하지는 못한다. 그야말로 각박한 시대다. 위로마저 경쟁거리가 되어 버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위로 받을 음식이 아닌 맛을 음미할 여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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