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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Oct 22. 2023

8. 형식으로 언어 나누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지위

질문하는 언어학

[교수] 그럼, 이제, 언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가지는지 살펴봐야겠죠? 1조, 문제 풀어 주세요. 


[학생12] 예! 1조 ‘집에 가고 싶죠’입니다. 문제는 ‘언어의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설명하면?’입니다. 저희 조에서 정리한 것은, 언어의 형식은 음성이고 언어의 내용은 의미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교재에 ‘우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단어 ‘우산’의 음성은 [u:san]처럼 발음되는 말소리이고, 그 의미는 ‘☂처럼 생겨, 비를 막기 위해 머리 위에 펴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수]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언어의 형식을 그대로 줄여 언어 형식이라고 하고 언어의 내용을 역시 그대로 줄여 언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기호 형식 및 기호 내용에 대응하는 언어 형식 및 언어 내용이라는 용어를 얻을 수 있죠. 그런데 전통적으로는 언어 형식을 가리키기 위해 음성이라는 별도의 용어를 써 왔고, 언어 내용도 의미라고 해 왔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음성과 의미의 결합인 것이죠. 기호가 형식과 내용의 결합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이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건,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음성으로 된 언어. 이게 바로 음성언어죠. 이때 언어는 기호의 형식들 가운데 어떤 것을 채택하고 있나요? 그렇죠! 바로 청각적 형식을 사용하고 있죠! 그러니까 음성언어는 일정한 청각적 형식에 일정한 의미가 결합한 기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에는 이렇게 음성언어만 있나요? 아니죠. 하나가 더 있죠! 바로 문자언어입니다. 그렇다면, 문자언어가 취하고 있는 기호의 형식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문자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형식, 바로 시각적 형식이죠. 문자언어는 일정한 시각적 형식에 일정한 의미가 결합한 기호입니다. 그럼, 이때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과연 두 가지 언어 중에서 언어학의 일차적인 연구 대상은 무얼까 하고요. 학생,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나요? 조별 토의가 필요한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몇 분 드리겠습니다. 


( 조별 토의가 시작되었다. 어떤 학생은 음성언어가 기본이 되는 언어이고, 문자언어는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생은 특히 현대 사회를 보면 문자언어의 중요성이 매우 커서, 문자언어야말로 언어의 가장 발달된 모습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언어학의 연구를 보면, 고문서에 적혀 있는 글자를 해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역시 문자언어 쪽을 두둔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음성언어가 있어야 문자언어가 가능한 거 아니냐며 항변하는 학생도 있다.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약속된 시간이 흘렀다. )


[학생12] 저희 조에서는, 문자언어가 언어학에서 일차적인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국어사 연구를 하려면 당시의 문헌에 쓰인 글자부터 우선 해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당시의 음성언어는 직접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걸 보면 문자언어 연구가 일차적이고 음성언어 연구는 이차적입니다. 예전의 언어에 대한 연구에서는 그렇지만, 현대 국어 연구에서는 굳이 문자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음성언어를 직접 연구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반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국어에서도 음성언어에 비해 문자언어가 더 복잡하고 고급스러운 언어의 모습이라면, 당연히 현대 국어 연구에서도 문자언어는 음성언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교수] 흥미로운 답변 잘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정말 열심히들 토의를 했군요. 그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학생이 방금 답변하면서 일차적, 이차적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의미가 정확히 무언지 알고 싶어요. 연구의 단순한 시간적 순서를 뜻하는 건가요, 아니면 중요성의 순위를 뜻하는 건가요? 


[학생12] 물론, 연구의 시간적 순서도 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저희는 언어학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연구 대상인가를 뜻하기 위해 썼습니다. 


[교수] 예,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1조 학생의 답변에 대해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국어사 연구에서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죠. 학생의 말대로 국어사 연구에서 문자언어의 해독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말 그렇죠. 당시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문헌에 쓰인 문자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문자언어 해독의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요? 학생, 답해 볼래요?


[학생12] 그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언어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으니까요. 


[교수] 학생은 계속 당시의 언어를 알기 위해서 문자언어를 해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언어는 문자언어였다는 건가요? 


[학생12] 예? 예... 음... 당연히 당시의 언어는 문자언어인 것... 같... 은.... 데... 잠깐만요. 당시에도 음성언어를 썼을 텐데요. 그걸 직접 들을 수 없으니 문자언어를 해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조에서는요. 


[교수] 당시의 음성언어를 직접 관찰할 수가 없으니, 문헌에 남아 있는 문자언어를 해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얘기는, 문자언어 해독의 궁극적인 목표가 음성언어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학생12] 예? 그게 그렇게 되나요? 저희가 원래 생각한 거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요. 


[교수] 당시에도 음성언어가 분명히 있었다는 건 분명하죠. 안 그런가요?


[학생12] 예, 그렇습니다. 옛날에도 분명히 음성언어가 있었겠죠. 


[교수] 그렇겠지요. 사람들이 대화를 하며 음성언어를 주고받았겠죠? 사람들이 대화를 하며 문자언어를 서로 써 주며 대화를 하지는 않았겠죠? 물론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학생12] 예. 


[교수] 한국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우리가 문자언어를 갖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다들 잘 알고 있죠?


[학생12] 예. 15세기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교수]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한국어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오로지 음성언어로서만 존재했다는 걸 의미하진 않나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모두 갖추게 된 거고요. 


[학생12] 예, 그렇습니다. 


[교수] 그래요. 한국어는 15세기를 기준으로 그 전에는 오로지 음성언어로만 존재했었고, 15세기 이후로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언어학자는 언어의 두 가지 종류 중 어떤 언어를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 말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중 어느 것이 더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학생12] 음... 15세기 앞뒤의 모든 시기를 고려한다면, 한국어가 음성언어로 존재한다고 보는 게 가장 기본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문자언어는 나중에 등장했으니까요. 


[교수] 그렇습니다. 그래서 언어학의 일차적인 연구 대상이 바로 음성언어인 겁니다. 원래 언어는 음성언어로 출발하여 존재해 왔고 이후 필요에 의해서 문자언어가 추가된 거죠. 그렇다면 언어의 원래 모습은 음성언어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국어사 연구에서 문헌에 있는 문자를 해독하는 것도 당시의 음성언어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알기 위해서죠. 언어는 일차적으로 음성언어로 존재하고 이차적으로 문자언어로 기록되는 겁니다. 음성언어가 있어야 문자언어가 있을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상황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지구상에 쓰이는 많은 언어들 가운데 아직도 문자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상당해요. 음성언어로만 존재하는 언어들이 매우 많다는 겁니다. 이런 언어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음성언어를 대상으로 한 언어학만이 가능하죠. 따라서 언어학의 일차적인 대상은 문자언어가 아니라 음성언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가요? 이해되나요? 


[학생12] 예... 저희가 좀 더 나갔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교수] 아까 1조의 답변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런 주장을 펼치기도 쉽지 않아요. 정말 좋은 발표였습니다. 국어사 연구에서 문헌 해독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포착한 것이나, 특히 현대 국어 시기에서 문자언어가 음성언어에 비해 크게 주목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은 매우 좋았습니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음성언어의 질서와 문자언어의 질서가 과연 동일한가입니다. 앞에서 내가 말한 대로라면, 문자언어는 마치 음성언어의 그림자 같아 보이죠. 이것을 음성언어 중심주의라고 불러 봅시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차이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음성언어 중심주의에 반대하며 오히려 문자언어가 더 근본적인 언어라고 주장하는 학자까지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관계나 위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학교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같은 데서는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더 기본적이고 중요하다고 답해야 됩니다. 그러나 학문의 차원에서는 권위나 전통, 주류적 시각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나 타당한 논리가 더 중요해요.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 문제를 폭넓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실의 열기가 후끈해졌어요. 잠시 10분 정도 쉬며 열기를 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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