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를 집대성하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제자백가들은 자신의 사상의 근원을 높이면서 정당성을 찾았습니다. 제자백가의 시작이었던 공자는 주나라를 세웠던 문왕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왕도王道를 실천한 기준으로 주나라 문왕을 세운 것입니다. 이에 유가에 대응한 묵자는 주나라 이전인 하나라의 우왕을, 장자는 아예 태초의 황제를, 여기에 맹자는 다시 요, 순임금을 높이면서 점차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다시, 순자로 돌아와서 순자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위한 예치禮治의 방법으로 전국시대의 현실을 정면에서 응시합니다. 당시 제자백가들은 춘추 시대(전국시대 이전)에 5패五霸를 폄하했습니다. 자신의 사상적 근원의 왕을 높이면서 현실의 춘추 5패五霸를 깍아내렸던 것이죠. (춘추 5패五霸란, 춘추시대에 뛰어난 성군이었던 5명의 왕을 뜻합니다.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월나라 구천, 오나라 부차) 그러나 순자는 그러한 평가방식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춘추 5패五霸의 패도覇道를 적극 옹호합니다. 난세亂世에는 성인들의 방법이 먹힐 리 없으니, 춘추 5패五霸의 방식으로라도 나라를 평안하게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명분이었죠.
맹자의 유가가 '왕도王道'를 비롯해서 제자백가 사상은 추상적 개념화의 치밀한 논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경제학에서 보는 '완전 경제'와 같은 경우입니다. 서양의 관념론들이 추상적 개념화로 현실의 어떤 것을 떨어트려놓고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를 전제로 이론을 전개합니다. 물론 추성적 사유 자체가 치밀한 논리로 완성된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수많은 변수에 의해서 상황마다 다르게 작용하니까요.
이에 반해 순자는 왕도王道를 인정하지만, 패도覇道를 적극 사용한다는 '선왕후패先王後覇'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예치를 들었습니다. 하나의 개념에 매몰되지 않고, '선왕후패先王後覇'와 예치를 통해 상황과 조건에 맞는 제왕학, 정치학을 정립합니다.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싣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 순자 <왕제>
군주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서 난세亂世에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순자는 역사적 맥락에서 사회를 고찰합니다. 순자는 '왕패병용', 즉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치세治世와 난세亂世를 구분하여 시대 상황과 조건에 맞게 군주가 처세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순자는 한발 더 나아갑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법에서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합니다.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수준에 따라 예치의 방법을 구체화했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인 태평성세太平聖歲에는 도가의 방법을 흡수하여 '제도帝道'를, 현실의 소강세小强世에서는 묵가와 맹자를 비롯한 유가를 흡수하여 '왕도王道'를, 난세亂世는 한비자의 법가를 수용한 '패도覇道'를, 마지막으로 극도의 혼란한 위난세危亂世에는 종횡가와 병가의 '강도亂世'를 따를 것을 주문했습니다.
순자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사회적 통제를 통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관점을 가졌고, 이는 후에 이사와 한비에게 전해집니다. 법치, 법가사상으로 정립되어 진나라 통일의 기반이 됩니다. 반면 법가는 순자가 믿었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을 제거함으로써, 정치 방법으로의 날카로움만 도드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역사에서는 유가가 가지는 진나라, 법가에 대한 반감의 작용하면서 순자도 같이 매도됩니다. 구체적으로는 패도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이유 때문에 송나라 주희에게서 이단으로 몰립니다. 그렇게 순자는 동양철학에서 비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서, 동양사상 자체가 맹자-성리학으로 이어지는 형이상학으로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