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 만능주의
언제까지 엑셀에만 의존할 것인가?
마이크로소프트社의 엑셀은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한 응용프로그램 중 하나이지 않을까?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풍부한 함수 그리고 비주얼 베이직 기반의 사용자 프로그래밍 환경을 제공하는 듯 쉬우면서도 강력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유도까지 열어뒀으니 정말 엄청난 애플리케이션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엑셀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내용을 다루기 전에 나는 엑셀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임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나는 대략 20년 전이던 학생 시절에 엑셀이 너무 좋아서 자발적으로 컴퓨터활용능력 1급 자격증을 땄었다. 2000년도 초반에 제품 생산을 하는 회사에서 생산 및 재고관리를 엑셀로 근사하게 만들어 당시 수준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성공시켜 본 경험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엑셀을 종종 사용한다. 주로 임시로 필요한 일회성 작업에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개발 작업을 하면서 코드를 작성하기 전에 미리 연산을 시뮬레이션해본다거나, 특정 영역만 변경되는 반복 텍스트를 대량으로 만들어 낼 때도 사용해 보곤 한다. 때때로는 장기적으로 사용할 엑셀 파일을 만들기도 한다. 주로 새롭게 추가되는 데이터를 대상으로 같은 형태의 계산을 반복해야 하고, 그 데이터의 발행 속도나 볼륨이 그렇게 크지 않을 때 엑셀을 적극 활용한다.
나는 직업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다 보니, 소프트웨어 도구를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석가가 말하기를 집착은 번뇌를 만들어 낸다. 번뇌는 고통스럽지만 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엑셀의 본질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이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목적은 행과 열로 구성되어 있는 숫자 표를 빠르게 계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에 있다. 표 형태의 시각화는 우리로 하여금 정형화된 패턴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안정감을 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의 '엑셀 만능주의'가 시작되는 것 같다.
'엑셀 만능주의'는 굳이 엑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엑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엑셀을 사용하려고 하거나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회사 업무 중에서 '엑셀 만능주의'가 가장 빛을 발하는 업무는 아마도 '취합 업무'일 것이다. '다들 한 번쯤'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목록이나 일정을 수집하는 요청을 메일에 첨부된 엑셀을 통해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들 한 번쯤'이 얼마만의 한 번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한 달에 한 번인지, 한 주에 한 번인지, 하루에 한 번인지, 한 시간에 한 번인지 말이다.
나는 가끔(?) 있는 이런 형태의 취합 요청을 받으면 스트레스 수치가 확 올라간다. 비효율을 견디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한 번 쪼개 본다면 대략 이럴 것이다. 우선 메일에서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하여야 하고, 무거운 개발 툴이 안 그래도 많이 열려있는데 굳이 엑셀을 열어서, 정형화할 수도 없는 데이터 표에 무언가를 기입한 후에,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서 굳이 임시로 바탕화면에 파일을 만들고, 다시 메일로 돌아와서 회신을 누른 후에, 굳이 다시 첨부를 하고 전송을 한다. 아 굳이 열었던 엑셀은 다시 닫아야 한다. 수신인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오는 조각난 정형화 할 수도 없는 데이터 표에서 값을 복사해서 취합 본에 붙이기를 해 나간다. 여러 파일들을 삭제해줘야 하는 것과 메일함에 불필요한 용량 차지하는 건 덤이다.
취합하는 사람이 조금만 고민하면 훨씬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구글 스프레드시트와 같이 웹 URL로 접근해서 다중 사용자가 동시 편집한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하는 것이 있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요즘은 스마트 업무환경 아래 회사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업무 소프트웨어에도 얼마든지 취합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도구들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취합 업무에 대한 회신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불평을 하기보다는 취합 요청을 받는 사람이 딱 필요한 일만 하고 다시 본래 업무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취합 업무 외에도 보고서 작성, 목표 및 일정 관리, 발표 자료로도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당연히 그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작업이 유기적으로 호환이 되어야 한다면 보고서 작성에는 텍스트 편집 도구를, 목표 및 일정관리는 프로젝트 관리 툴을, 발표자료는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엑셀의 본질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 용이성을 고려하여 취사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인사이트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사람이 기입해야 전체 보고 내용이 주기적으로 완성되는 진척사항 관리 같은 경우는 웬만하면 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스폰서에게 별도 보고해야 한다는 이유로 업무 도구와는 별개로 엑셀에 일정을 중복으로 기입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야 할 포인트는 '어떻게 하면 실무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보고 자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보고자는 보고 받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보고 받는 자는 보고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전체적인 효율화가 달성되는 것이다.
번외지만 나는 구글 스프레드시트와 프레젠테이션을 처음 봤을 때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 도구만 있으면 회사의 모든 비효율적이고 소통 비용이 높은 업무들은 다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임회사에서 근무할 때도 저런 제품들을 도입할 때 기존 데스크톱 엑셀과 파워포인트의 화려함과 부가적인 기능들을 못 쓴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이 개발자로서는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결론적으로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아주 만족도 높게 다들 잘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나는 엑셀을 좋아하지만 싫어한다. 본질에 맞게 잘 사용한 엑셀 파일은 아름답다. 그 파일을 열어보면 이 사람은 프로그래밍을 했어도 고퀄리티의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겠다는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결국 코드를 잘 작성해야 하는 것, 유지보수하기 좋게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하는 것, 본질적인 요구사항을 충분히 담아내야 하는 것'들처럼 좋은 엑셀 작업을 한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