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8년, 미지의 나라 인도에 갔을 때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 만으로 16살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고등학교는 일반계가 아니었는데, 그 기회로 나는 어린 나이에 해외 기업에 국제교류를 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 악착같이 공부를 해서 악바리로 시험에 붙었고, 1학년 내내 스파르타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가 갈 수 있었던 여러 국가 중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인도'를 선택했다.
모두가 말렸다.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네가, 참을성 없는 네가 인도로 간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며 학교에서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나를 말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면모가 스멀스멀 올라왔던 그때 그 시절. 한 학년 선배인 언니 두 명과, 인솔 선생님과 함께 난생처음 10시간을 날아 인도로 떠났다. 그게 나와 인도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 뭄바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습하고 덥고 쾌쾌한 냄새가 나던 그 공항을 아직도 기억한다. 타지마할 호텔 테러사건이 났을 무렵이라, 공항은 더 철저히 경계했다. 그때 우리는 아우랑가바드라는 소도시로 이동해야 했는데 비행기 시간이 연착되어 그 삼엄한 공항의 분위기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어린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 할 때 지금 생각해보니 인솔해주시던 젊은 여자 영어 선생님도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싶다.
그렇게 뭄바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작은 도시, 아우랑가바드. 그곳에 있는 Videocon(비디오콘)이라는 인도의 삼성 또는 LG로 불리는 기업에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2-3주는 그곳에 있는 공장에서 세미나를 듣고 남은 기간은 푸네, 하이데라바드 그리고 뭄바이로 돌아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인솔해주신 선생님은 정말 우리를 아우랑가바드까지만 인솔해주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그렇게 선배들과 셋이 아우랑가바드 생활을 맞이했을 때였다. 아우랑가바드 지사 모든 관계자분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모든 부서를 찾아뵈었을 때, Tool Room이라는 부서에서 독특한 인도인 아저씨를 만났다. General Manager로 Tool Room을 관리자셨던 그분은 우리 셋을 누구보다 더 격렬히 반겨주셨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 종종 출장을 가셔서 한국을 좋아하시고 인연이 있으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명함을 나누어주셨는데, 나는 그분이 왠지 너무 포근해서 아빠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날 바로 이메일로 명함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한국에 오시면 꼭 한 번 뵙자고 연락을 드렸다.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출근을 했는데 그분께서 찾아오셨고, 시간이 되면 꼭 한 번 집에 놀러 오라고 하셨다. 자기 딸과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둘이 친구가 되면 좋지 않겠냐며 꼭 연락하고 지내자면서 말이다. 그리고 본인을 Sir (존칭)이 아닌 Uncle로 불러달라고 하셨다. 그분의 자상함이 너무 좋았고, 인도를 더욱더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턴이 끝나고도 참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내겐 첫 인도인 친구이자, 삼촌이었고 아빠였다.
이전 이메일은 모두 어디 갔는지 2010년 8월부터만 남아있다.
영어를 잘 못했던 나임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기 위해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메일을 썼다. 내게 좋은 글귀가 있으면 늘 보내주셨고 근황을 위해 가족들의 사진도 보내주셨다. 그렇게 2008년에 시작된 인연은, 계속되었고 2009년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 인도로 고등학교로 갈 때 그분께 내가 인도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너무 기뻐하셨다. 다만 그때 나는 북인도 뉴델리에서 3시간이나 떨어진 먼 곳에 있었고, 그분은 서인도 아우랑가바드에 계셨기에 뵐 수는 없었지만 매번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락이 잘 닿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아빠는 나를 기다려주셨고, 늘 먼저 연락을 해주셨다. 언제든 힘이 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나를 막내딸이라고 불러주셨는데 19살에서 20살이 되던 그 무렵 아빠를 뵈러 다시 아우랑가바드에 갔다.
아빠와 처음 뵙는 인도 엄마, 그리고 언니가 모두 나를 반겨주셨다. 푸네라는 작은 도시에서 홀로 5시간 동안 로컬 버스를 타고 아우랑가바드에 간 나를 혼내셨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위험한데 이걸 타고 오냐며 속상해하셨다. 언니는 아빠를 쏙 닮아있었다. 아빠네 가족은 벵갈리였다 (콜카타 주에서 온 사람을 칭하는 말) 그래서 생선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아빠네 머물며 생선을 참 많이 먹었다. 정말 내겐 집 그 자체였다. 나를 위해 방 하나를 꾸며두셨고, 이왕 장기 여행 온 거 오랫동안 머물다 가라고 하셨다. 그때 아빠의 어머니인 할머니와 친척들 그리고 아빠의 동네 주민들까지 모두 만났었는데 모두가 나를 한국에서 온 딸이라고 불렀다. 아빠는 내가 그 후에도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를 불러 나를 늘 도와주셨다. 내가 인도 전역 어디에 있던 아빠는 늘 사람을 보내주셨는데, 도와주시는 모든 분이 내게 하던 말이 기억난다.
한국에서 온 딸이라고 들었어요. 미트라 씨 딸인데, 제가 어떻게 안 챙기겠어요.
콜카타 2013
2013년 푸자 언니의 결혼식
한국에 계신 부모님 두 분도, 인도 아빠에게 예나 지금이나 늘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보고파하신다. 내게 주신 사랑을 되갚고 싶었는데 마침 아빠가 한국에 출장을 오시게 되셨고, 한국 부모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셨다. 그때 나는 인도에서 대학생활 중이라 함께 뵐 수 없었지만 나이가 비슷해 세 분은 친구가 되셨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 아빠가 또 한국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모든 가족이 인도 아빠와 함께 만났다. 아빠에게 서울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모든 가족이 시간을 비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마음으로 맺어진 인연은 계속되었고 아빠의 진짜 딸인,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콜카타로 갔다. 유일한 외국인이자 아빠의 두 번째 딸이던 나는 시집가는 언니를 보며 함께 울었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인도를 영영 떠날 줄 몰랐는데, 2014년,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느라 약속하며 인도를 떠났고 2020년이 된 지금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아빠를 만나 뵙지 못했는데, 그래도 아빠는 항상 내게 먼저 이제는 이메일이 아닌 페이스북 메신저로 우리 딸 잘 지내냐며 종종 쪽지를 보내주신다. 요즘은 인스타그램도 시작하셨는지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시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네 부부를 그리워하시며 종종 근황을 내게 보내주신다. 지난 오랜 기간 여러 나라에 거주하고 근무하며 힘들 때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아빠에게 털어놓았다. 어쩌면 진짜 친아빠보다 더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나를 'Baby' 아기라고 불러주시는 아빠가 그리워서 오늘 먼저 연락을 드렸다.
"아빠 여전히 담배 안 끊으셨죠? 술도 드시고요?"
그러자 아빠가 담배는 이제 끊었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며 웃으셨고 코로나가 지나고 나면 인도에 이젠 돌아오라며 결혼할 남자 친구 아빠한테 소개는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그와 함께 아빠를 뵈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벌써 12년이나 된 우리의 인연, 내가 인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인도인 아빠가 계셔서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도는 내겐 아픈 손가락 같은 곳이라, 한번 돌아가면 절대 떠나고 싶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여태 못 갔었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아빠를 보러 인도에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