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둘에 받은 사랑고백

by Lisa


열두살 둘째 아이가 침대에서 속삭였다.



"엄마, 사랑해요. 제 마음속에는 사랑의 숲이 있어요. 그리고 그 숲에는 열그루의 나무가 있어요. 그중 여덟그루는 엄마를 향해있어요."


세상에서 이렇게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있을까?


아이에게 그 순간만큼은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사랑의 숲이 있고, 그 숲에는 천억 그루의 사랑의 나무가 있어. 그리고 그 천억 그루는 모두 너를 향해 있어."


바로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첫째가 확진을 받았을때, 그 숲의 나무는 모두 첫째를 향해 있었다. 매일 여섯시에 출근하는 남편이 얼굴이 푸석거리고 눈밑이 떨린다고 할땐 또 남편을 향하기도 했다.


어젯밤 막내가 사랑고백을 한 그 순간만큼은 온 우주의 사랑이 모두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 충만함이 들었다.


사랑은 에너지이기에 몇마디의 단어만으로 사랑을 충만하게 한다.

© lucabravo, 출처 Unsplash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활동을 재평가하라고 요구해보았다.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그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혹은 싫었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카너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시각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즐거운 순간과 지겨운 순간을 평가하게 한 결과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걸린 딸을 위해 하루종일 밥을 하는 나. 세끼 차리면 하루가 다 가버린다.

이것은 사람들이 무엇이 정말 자신에게 좋은지를 모른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 유발하라리 사피엔스 인용-


나 역시 집에서 온갖 뒤치닥거리 중이다. 하루는 단순하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는 아침점심 저녁 간식을 차리고 나면 하루가 가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참한 노예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것은 삶의 의미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이다. 나 역시 모든 종류의 삶을 응원한다. 솔직히 말하자. 솔직히 부러울때도 가끔. 아니 많다. 가끔 동생들이나 딸들에게 결혼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고 하고싶은대로 살으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솔직히 고백하건데, 삶은 의미의 집합이며,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며, 단순한 운이나 쾌락으로는 의미를 찾기 힘들기에.


남편과 두 딸에게, 당신들이 있어서 진짜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에세이,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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