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조절에 서툴다.
철학상담을 공부하며 스토아 형님들의 조언을 듣고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잠시 철학 이야기를 하자면, 그리스 시대의 스토아 학파는 아파테이아를 강조했다.
아파테이아는 부동심이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침대에만 필요한건 아니니까.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마음도 필요하다. 그들은 감정의 상태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마음을 강조한다. 포커칠때 딱 좋을 것 같은 부동심이다.
하지만 나는 스토아 처럼 부동심을 갖지 못하고,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는 정념의 노예일 때가 많다 . 아마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일테다. 그런 나이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부동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엄마는 아이들의 우주이니까.
하지만..
첫째가 확진되고 아침점심저녁 끼니를 챙기는 무한 노동을 2주째 반복하며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다.게다가 매일 가던 태권도도 못가며 나의 정신력은 0에 수렴했다.
누구라도 건들이면 빵하고 터져줄테다의 상태였는데 어제 올것이 왔다. 아이가 확진되었을때 집에 없던 남편과는 생이별중이고, 어제 부동산 문제로 남편과 통화를 하다 나의 부동심의 줄이 끊어져버렸다.
남편과 통화를 하다 질질짜고 있는데,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우리집 꼬맹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등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고 엉엉 울어댄다. 사실 큰일은 아니었는데 아이가 우니까 더 슬퍼진다. 눈물이 찔금 날정도 였는데, 이제는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우리는 그렇게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별일 아닌 일로 말이다.
둘째는 어려서 부터 감수성이 풍부하다. 다른사람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드린다. 그래서 배려심이 깊고, 사람을 잘 관찰한다. ( 물론 현실 자매인 언니에게는 왠지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엄마의 감정에 유독 예민한 편이다.
세살도 되지 않았을때 산불속에서 아기들을 온몸으로 막던 엄마까투리를 보고 아이는 엄마새가 너무 불쌍하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정말로 옆에 있는 사람도 눈물이 날 정도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생각해보면, 엄마까투리는 너무 무서운 만화이다.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24개월 즈음, 잠시 비디오를 틀어준적이 있다. 아기호랑이 호비가 생애 처음으로 엄마와 생이별을하고 유치원 버스를 타는 장면이었다. 그때 아이는 비디오를 보다가 아기가 울기시작했다. 호비가 막 버스를 타고 엄마와 빠이빠이를 하던 장면이었다.
우리집 둘째는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엄마를 외치면서. 우리집 아기에겐 엄마를 두고 유치원에 가는 호비의 내용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이기에 되도록 유쾌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드물지만 어제같은 날도 있기마련이다.
그러면 아이의 우주에는 비가내린다. 언제나 행복으로 가득차있는 초등학생이 마음에도 먹구름이 몰려온다. 친구와 다퉈도, 시험을 잘 못봐도 아끼던 장난감이 부서져도 왠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아이의 마음속에 슬픔의 감정이 몰아친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이렇게 온몸으로 기꺼히 염려해주는 존재가 있기에 나의 우주는 사랑으로 가득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