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맹탐정 고민을 부탁해 ( 맹탐정 고민상담소 를 읽고 )
* 본글은 원주시에서 주관한 한도시 한권읽기 글쓰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
치악의 메아리에 수록되어있습니다.
할머니, 사춘기가 대체 뭐예요?
내 생각엔 말이야 에미들이 자식을 키우기 힘들 때 그냥 써먹는 말 같아.
맹 탐정 고민 상담소의 맹 탐정 승지 할머니의 명언이다.
6학년 엄마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기승전 사춘기다.
“방문을 왜 이렇게 쳐 닫는지, 사춘긴가 봐요”
“동생이랑 왜 이렇게 싸우는지, 사춘긴가 봐요.”
“당최 뭐든 하려 고를 안 해요, 사춘긴가 봐요”
책에서는 이것을 "사춘기 병"이라고 일컫는다.
청소년이 걸려서 사춘기 병이 아니라, 죄다 무슨 일만 생기면 다 사춘기 탓을 하는 엄마들이 걸린 병이 ‘사춘기 병’이란다. 아이가 왜 그럴까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생각하려 하지 않고 사춘기로 치부해버리는 엄마들의 고질병. 정작 그사이에 아이들은 곪아가고 있을 진데, 기승전 사춘기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어제는 소파에 진득이 앉아 "맹 탐정 고민 상담소"를 읽었다. '한 도시 한 권 읽기' 선정 도서이다. 도서관에 서서 대충 훑어보다, ‘사춘기’ 딸이 읽으면 좋은 것 같아 빌려왔다가, 시간이 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소파에 궁둥이를 붙인 채, 무려 두 번을 연달아 읽고 말았다. 사실 그 뒤로 화장실에서 한 번 더 읽는 중이다.
두 번 세 번 열 번 읽은 책은 많지만, 궁둥이를 붙이고 연달아 두 번 읽은 책은 처음이다. 큰일 날 책이다. 사춘기 소녀 권장 도서 정도의 책이 아니다. 나는 당장 갱년기 때문에 마음속에 불이 타올랐다 꺼졌다 한다는 언니에게 이 책을 권했다.
“이 책 말이야 사춘기 권장 도서의 탈을 쓴 갱년기 권장 도서야.”
그렇다.
이 책은 앞으로 자아를 찾을 사춘기를 위한 책이자,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한 우리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중학교 1학년 맹승지는 작은 시골 마을의 유일한 탐정이다. 성이 맹 씨여서 맹 탐정이다. 아빠가 명 씨였으면 명탐정이었을 텐데. 자타공인 탐정은 아니고 그냥 본인 스스로 탐정이다. 아빠는 자아를 찾아 떠나간 지 오래고 일 년에 한두 번 집을 찾아온다. 자아를 찾아 떠난 아빠를 대신해 '전통 카페'를 운영하는 엄마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무려 서울대를 나온 아빠는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해 그것을 찾으러 집을 나갔고. 아빠 머리를 닮아 영특한 큰언니는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엄마는 언니가 의대에 갈 거라고 한다. 맹 탐정은 언니가 의대에 가서 아빠처럼 자아를 찾아 떠나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엄마는 “의대 간 후에는 자아를 찾아 떠나도 된다”라고 한다.
맹 탐정은 동네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시작한다. 핸드폰 분실사건, 영은 언니 엄마의 미스터리, 인혜의 자아 실종 사건, 용우 컴퓨터의 비밀 사건을 해결해준다. 이혼 소송 전문 변호사. 상속 전문 변호사가 있듯. 맹 탐정은 사라진 시체나 범인을 찾아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고민 전문 탐정의 길을 걷게 된다. 각각의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독자 각자가 책을 읽어봐야 알 일이고, 책의 가장 큰 주제는 이러하다.
중학교 1학년 맹 탐정과 친구 인혜는 이제 막 자아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마흔이 훌쩍 넘은 맹 탐정의 아빠는 서울대씩이나 나왔으면서 아직도 자아 찾아 삼만리다. 맹 탐정의 할머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1981년생이다.
딱 나의 어머니가 맹 탐정 할머니쯤의 연세이다.
맹 탐정의 할머니가 ‘할머니는 자아를 찾으셨냐는’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있다.
내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셨다.
자아가 집을 나갔던 말든 신경을 쓸 겨를도 없던 나의 부모님은 내가 ‘자아’를 찾는 것보다 ‘대학’을 찾고 ‘대기업의 취업자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아빠는 나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틀렸고, 맹 탐정의 할머니 역시 틀렸었다.
인생은 그냥 참기만 한다고 미래의 행복이 보장되는 만기가 정해진 적금통장 따위가 아니다.
작가는 맹 탐정의 입을 빌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행복임을 이야기한다.
첫 작품 후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며 작가는 현실에 무너지는 꿈에 두려움을 느꼈고, 맹 탐정과 친구들 그리고 자아를 찾아 떠난 아빠를 통해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맹 탐정네 아빠처럼 나이 마흔에 ‘자아’ 찾아 삼만리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아의 발뒤꿈치 각질이라도 만져봐야 했을 텐데, 공부만 하면 다 된다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답게 오답률을 줄여나가는 것에만 몰두했다. 정작 진짜 인생은 ‘오답투성이’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부터였던 것 같다.
나의 자아가 ‘나에게 말도 없이 소풍하러 갔다’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 뭔가 분명히 열심히는 사는 것 같은데 속은 텅 비어서 덜커덩거리는 요란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속이 시끄럽게 울렁거렸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남들과 비교하는 인생만을 살았다. 남들보다 더 높은 등수, 남들보다 좋은 대학, 남들보다 좋은 회사. 생각해보니 그게 더 쉬었던 것 같다. 내가 계획하지 않아도, 남들과 비교해서 조금만 잘하면 되는 삶이니까. 그러다가 이선주 작가처럼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며, 퇴사를 하고 ‘전업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경쟁이 없는 인생에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남들보다 잘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공부나 일을 지시하는 사람도, 비교할 ‘경쟁자’들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공허가 남았다. 잘하는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생각해보지 않은 나는 바로 자아 없는 ‘경쟁 로봇’이었다.
나는 지금껏 나이만 먹었지, 미성년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없는 미성년. 사춘기 없이 바쁘게 살던 내게 이제야 사춘기가 온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 경쟁과 욕심을 아이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큰아이가 명문 중학교 입시를 보았다. 고백하건데 아이는 관심이 없는데, 내 욕심에 시험을 보게 했다. 아이는 떨어졌고, 크게 실망하지 않았지만, 내가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것, 마냥 우울해했다. 도대체 내가 원한 것은 뭘까? 나처럼 사과껍질 하나 깎지 못하고,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도 못한 채, 남들과 비교만 하는 삶을 원했던 걸까?
책을 읽으며 비로소 느꼈다.
내 딸들이 맹 탐정처럼 자신과 친구의 자아에 대해 실컷 고민하고 마음껏 일렁이게 좀 내버려 둬야겠다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 "실수하지 마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실수도 실컷 해보고, 자아를 찾아서 여기저기 뛰어다녀볼 기회를 줘야겠다. 그럼 맹 탐정 아빠나 나처럼 마흔이 넘어서야 '자아를 찾아야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승지의 아빠를 보며 몇 년째 고시 준비중인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삼수를 했고. 스물여섯에 대학을 졸업해서 칠년째 고시 준비 중이다. 처음에는 임용고시였고. 두 번째는 9급 공무원이었다. 작년엔 가족 모두가 100% 합격을 확신했었다. 가채점 결과는 좋았는데 어이없이 낙방했다. 모두가 이제 그만하자고 했고 동생은 연봉 1800이 채 안 되는 작은 사무직에 취업했다. 맹 탐정의 아빠처럼 서울대는 아니었지만, 명문대 출신인 동생은 한 달 만에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동생은 정말 마지막으로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있다. 책속에서 맹 탐정의 아빠는 자아를 찾아 떠났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러 떠났었다. 떳떳한 아빠 효자 아들 믿음직한 남편이 되기 위한 길로 ' 사법고시 합격'라는 하나의 정답을 정해 두고 말이다. 그러나 맹 탐정은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아빠가 변호사가 되었다면 자아를 찾았을까? 변호사가 되지 못했다고 자아는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내년엔 제발 동생이 그토록 원하는 그 꿈을 이루길 소망한다.
그러나 그 뒤에 '자아'도 찾길 기도한다. 시험 끝에 오는 행복의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며, 부디 인생의 행복은 적금 만기가 아니라, 참고 인내한다고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