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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Jun 16. 2020

D-DAY 여행처럼

현실자각타임에서 판타지까지

평소 계획없이 지내던 사람도 여행을 가기 전엔 꼼꼼해진다. 내 경우가 그렇다. 가이드북을 사서 읽거나 유명 블로거의 여행 루트를 살펴본다. 맛집을 찾고, 교통편을 알아보며, 유명 관광지를 예습한다. 여행지의 대략적인 구조를 머리 속에 넣는다. 하루하루 대책없이 사는 내게 여행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대뜸 상사의 질문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 뭐 할거냐?" 나는 "뭘 해야 할까요?"라는 대답을 애써 누르며,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대답을 한다.


인생은 늘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부터 우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인생의 주인공은 본인이다라는 아주 오래 된 말을 언제까지고 믿을 순 없을 것 같다. 매 순간의 우여곡절들이 지금의 인생을 만들고, 나는 그 상황에 맞춰 적당히 반응하면 되는 것 같다. 결국 본인은 인생에 수렴된다, 우여곡절에 종속된다. 내 앞에 놓인 지금, 내일 펼쳐질 미래 따위를 예측하긴 쉽다. 그리고 매 순간 최선을 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유명 자기계발서는 제목, 저자만 바뀐 상태로 계속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당최, 긍정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난한 하루가 흘렀다. 업무를 마치고, 밀린 업무일지를 쓴다. 7일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그 기간동안 나는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과거의 일을 앞으로의 계획인 양 복습하는 건 쉽지 않다. 지난 일주일에서 "일"을 빼면, 무엇이 남아있는지. 기껏 힘들게 지나 온 과거들이 나를 부정하는 것 같다.


나는 현실이 부정적일 때,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최근 가장 행복했던 여행을 떠올려본다. 여행하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혹은 변주되는 다양한 위기상황을 감지할 때의 그 울렁거림과 여행에서의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 다가올 때의 마음은 질적으로 다르다. 때론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 겨우 도착한 숙소에서 여독을 풀며 마신 맥주의 톡 쏘는 맛을 복기한다. 퇴근길 한복판 수많은 인파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때도 나는 최대한 상상한다. 지금 나는 다음 여행지를 가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버스를 놓쳤다고. 혹은 버스는 탔지만, 현지어에 익숙하지 않아 이상한 곳에 내렸다고.


지금 이 순간부터 내일까지 나는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가슴이 뛰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다녀왔거나", "다녀오지 않은" 여행의 복기와 상상으로 글을 써보고 싶은 거다.


잠깐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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