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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Oct 19. 2020

노력과 행복이 일치했던 순간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


타사 동료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였다. 동료는 내게 이 말을 하며, 코트와 가방을 꺼내 들었다. 벌써 가을이 찾아왔지만, 올해는 특히 계절감이 없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 나는 순간 잘못들은 건가, 하고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바람을 어느 한순간 체감했을 때처럼.


여러 생각이 들었다. 왜 가을은 한순간도 부드럽게 오는 경우가 없는지. 올해는 긴 장마와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터라, 유독 계절이 바뀌는 것에 민감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별 뜻 없는 그 한마디에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열심히 사는 것과 행복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 딱 한번 왔었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의 소설 창작 시간이었다. 첫 수업 때부터 교수님은 학생들을 어떻게 과제 더미에 파묻히게 해 줄까에 대한 고민을 여름방학 내내 한 것 같았다. 장편소설 필사부터, 중편소설 창작까지. 3학년 수업의 꽃은 2학기 소설 창작이라고 선배들에게 익히 들었었다. 이유는 창작과 합평 때문이었다. 물론 1학년 때부터 엽편 글 창작, 합평의 과정을 수 없이 지났지만, 3학년 때의 합평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분위기가 남다를 거라는 말도 있었다. 나는 정말 자신 없었다. 3학년 1학기에 창작한 단편소설을 소개했을 때 받은 합평은, 기억을 재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가장 먼저 소거해야 할 부분일 정도였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아예 기억 저편의 무의식에 가둬야 하는데. 우리 과 특성상 합평은 떼려야 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수업방식이기 때문에 그 기억을 아예 잊고 살 순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엔 단편이 아니라 중편이라니. 숫자로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1학기 합평 때 받은 수치심을 최소 두배 정도는 깔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글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내가 혹시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였으니까.


교수님이 여름방학 내내 과제 플랜을 세운 것처럼 나도 여름방학을 마냥 놀며 보내진 않았다. 그렇다고 대단히 생산적으로 보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맘 편히 놀며 돈도 조금씩 벌고 싶단 생각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타임이었다. 밤잠도 없고, 때마침 그 시간엔 손님도 없을 테고. 돈을 벌면서 동시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래. 편의점 문을 잠그고, 창고에 올라가 영국 프리미어리그 박지성 경기를 챙겨 본 적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즐거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아르바이트였다. 바퀴벌레가 나타나기 전까진.


결론적으로 나는 그해 연말, 과에서 시상하는 소설 창작상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제목이... 뭐였더라. [편의점 25시]였던 것 같다. 파릇파릇한 청춘을 비좁은 편의점에서 소모하는 20대 주인공과 그를 괴롭히는 바퀴벌레와의 사투를 그린 소설이었다. 한심한 창작자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한심한 이야기와 어리석은 주인공 이야기였다. 우스꽝스러웠지만, 평이 후했다. 페이소스까지 느껴진다는 평을 들었을 때. 나는 혹시 이 전공을 택한 것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하) 생각보다 교수님께 좋은 평을 듣고, 나는 그날 밤부터 밤새 소설을 수정했다. 문장을 다듬고, 단락을 바꾸고, 제목을 바꾸고, 바퀴벌레의 등장 시점을 바꾸기도 했다. 결말을 바꾸고, 다시 바꾸고, 또다시 바꿨다가. 맨 처음 결말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을 소설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바퀴벌레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가장 비루하고, 나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비루한 청년에다 젊음을 마치 영원한 재물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것은 시간이었고, 시간은 늘 한 곳에만 머무른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이, 사실은 풀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바람이 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종종 잊곤 한다. 가을은 찾아온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어떤 것이었음을 그땐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경력을 사는 것보단 경험을 사라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비슷한 단어를 그럴듯하게 연결한 것 같지만,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변화무쌍한 문장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들만 모인 국가엔 경험이라는 풍속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험 속엔 난데없이 등장한 바퀴벌레와 사투를 벌이는 20대의 젊음이 있거나, 그것을 구태여 드러내는 청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언컨대 열심히 산다는 것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지만, 열심히 자신의 치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경험의 산물은 “열심히”와 “행복”을 이어준다.


그러니까, 그날의 그 기억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나 보다.


가을은 일 년의 경험을 통틀어 가장 비루했던 나 자신에 대한 체감이라고. 그러니 나는 이 가을에 열심히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가장 고귀한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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