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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Oct 11. 2020

수많은 은행나무 열매는 언제 치워지는가

이맘때 서서히 낙엽이 떨어지고, 은행이 도로를 더럽힌다. 낙엽이 발에 치이고, 짓이겨진 은행이 신발 밑창에 물든다. 그리고 이내 낙엽은 한데 모이고, 은행도 사라진다. 대개는 출근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뤄진다. 나는 가을의 감성적인 쓰레기들이 치워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게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어설프게 시구절을 썼던 적도 있고, 바닥에 노란 것을 토해내는 은행을 보며, 힘겹게 지워낸 풋사랑의 흔적을 꺼내어 본 적도 있다. 이것들을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을이 지나갔을까. 열 손가락을 펴보다가 다시 오므린다. 나이 들수록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진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말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럴 때 깨닫는다.


이것들을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제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그러니까 세상에 내 온몸을 맡기고 사랑해 줄 여유가 없어질 때부터였다. 쉽게 말해 나와 타인을 서서히 비교할 때부터 인 것 같다. 내가 받는 이 급여가 적절한 것인가, 에 대해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이 월급을 받아가며 미래를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을까. 생산적인 것인가. 나는 우리 집 전기밥솥의 존재감만큼 이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인가 혹은 그렇게 될 운명을 지녔는가(타고났는가). 어느 날 티브이에서 환경미화부에 지원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그때부터였을까. 그들이 그들의 직분을 다하기 위한다면, 무릇 낙엽과 은행은 가을이 뽐내는 감성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사라져야 할 쓰레기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거리에 적당히 쓰레기가 버려져 있어야만, 그 청년들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우리들의 고유한 시선, 내재돼 있는 성향은 어떤 경험을 통해 바뀌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 뜨고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빠르게 해치우고,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를 따라 등교했던 때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친구가 늦게 나오거나 내가 늦게 나가 등교시간을 맞추지 못해 선생님께 혼쭐이 났던 시대도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시대는 늘 다음 시대에게 먹힌다. 우린 그것을 몸소 지나면서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나는 문득 낙엽과 은행을 사랑하고 싶다. 그런 시선만 가진 채로 살고 싶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은 출근 시간에 방해되는 것으로. 지각은 있어선 안 되는 것으로. 전자레인지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팝콘 봉투 같은 지하철에 나 역시 수십 개의 팝콘 중 하나의 보잘것없는 팝콘처럼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을 또 깊게 생각하다 보면. 그날의 일이 썩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까지도 떠안게 되었다. 그래도 지하철 안에 있는 동안엔 자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어느 날 지하철 빈자리에 겨우 앉아 몸 편히 출근하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우유라도 먹고 가지. 힘이 안나잖아.”


나와 같은 시대의 환경미화부를 보지 않기 위해 일찍 나갈 때도 있고, 엄마가 잠에서 덜 깬 채로 아침상을 차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더이상은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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