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나 신조어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트렌드와 이슈 속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유행어를 보면 그 시대가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내로남불'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다. 또한 래퍼들이 유행시킨 '리스펙(트)'은 계급장 떼고 실력으로만 평가해서 존중하고 인정하겠다는 사고를 보여준다. '플렉스'라는 말도 과시하고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지금의 풍조를 보여준다.
요즘은 '찐'이라는 말도 여기저기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찐'은 한 마디로 진짜의 최상급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나 물건 앞에 '찐'이 붙으면 '진짜 좋다. 정말 좋다. 최고다'는 뜻의 수식어라고 보면 된다. '찐'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애용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동안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우리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일 수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다. 가슴이 도끼에 찍힌 것처럼 쓰리다 못해 아리다. 실망은 믿었던 만큼 깊이 파이고, 상처는 기대했던 만큼 깊게 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한 것은, 찐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찐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우리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지만, 이제 사람들은 '찐'이 아니면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을뿐더러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복음이 찐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찐이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사랑합니다'는 말에서 사랑이 진짜로 느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그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우리만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이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다.
영악한 사람들은 메시지(내용)가 아니라 메신저(전달자)를 공격한다. 메신저의 신뢰가 메시지의 신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메신저가 신뢰를 잃으면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소용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이와 같다. 사람들은 메시지와 메신저 곧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물과 물고기처럼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잘 다니거나 주일성수를 잘하는 것보다, 내가 믿는 복음이 찐인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내가 찐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