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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Sep 03. 2021

《때론 얄밉고 때론 기특하고》

이게 그거랑 같아요?

어제는 10살인 첫째와 아침부터 티격태격했다.

"아빠. 책상 위에 있던 색종이 어디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첫째는 전쟁통 같은 아침시간에 엄마한테까지 가서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엄마, 책상 위에 있던 색종이 어디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지금 그게 급하게 아니고 얼른 학교 갈 준비 하자!"


첫째는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첫째는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왜 몰라요? 여기 있었잖아요!"

"니 거를 네가 더 잘 알지, 엄마 아빠가 어떻게 알아? 엄마도 아빠도 모른다고 얘기했잖아!"


그럼에도 첫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왜 모르느냐고', 그 정신없는 아침 시간에 계속 같은 질문으로 진을 빼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한 마디 해 주었다.  

"하람아. 아빠 반지 어딨어?"

"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빠 반지인데 왜 네가 몰라?"

"그게 말이 돼요?"

"네 걸 아빠가 모르는 게 이상하다면, 네가 아빠 걸 모르는 것도 이상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이게 그거랑 같아요?"


왜 뭔가 보이지 않으면 항상 엄마 탓, 아빠 탓일 수 있을까? 물론 물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가 놀다 아무렇게나 방치해 놓고선, 필요할 때 어디에 두었느냐고 따지는 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왜 제가 필요한 걸 모르세요? 제가 원하는 건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어야죠!'라는 식으로 반응하곤 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문제가 터지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 따지는 모습도 어떤가?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만, 우리는 마치 당연한 논리인 것처럼 생각한다.


C.S 루이스가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 인간은 삶에 불행이 닥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고 꼬집었다. 꼭 그럴 때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께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그때도 하나님의 덕인 줄 알고 그분께 감사를 해야 앞뒤가 맞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실하거나 신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하고 신실하기를 기대한다.(그러시니까 하나님이시긴 하다.) 우리는 불순종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만이 많은 첫째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빠를 제일 먼저 챙기는 건 첫째다. 그래서일까? 첫째를 볼 때면 때론 얄밉다가도 때론 기특할 때도 많다. 이런 모습이 혼재되어 있는 게 첫째 아들이다. (참고로, 아내의 말에 따르면 첫째 아들이 아빠인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신앙의 여정에 우리의 기특한 모습보다 얄미운 모습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성화란 얄미운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기특한 모습은 점점 늘어나는 과정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신실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효자가 없는 것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그리스도인도 없다. 넘어지고 깨지고, 무지하고 깨닫고, 때론 얄밉다가도 때론 기특하기도 하면서 시나브로 '~다운' 모습으로 거듭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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