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인 세상에서 환대받는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냉대받았던 기억은 상처라는 이름으로 남고, 환대받았던 기억은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냉대받았던 걸로 글을 쓰면 냉기를 방출할 수 있고, 환대받았던 걸로 글을 쓰면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음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는 환대의 추억이 있다. 나를 복음으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있다. 그분은 평신도 사역자로, 여러 방면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맛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그걸 느끼도록 해 주는 일은 더 귀한 일이라는 걸, 그분을 통해 배웠다.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에 복학하기 전까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그땐 신앙의 초보였던 시절이라, 믿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분은 말씀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나를 응원해 주었다. 하루는 회사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몸 상태가 이상했다. 참고 견디고 버티는 게 체질이라, 잠깐 그렇겠거니 하고 일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이상했다. 결국 부서 담당자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퇴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어지러워서 혼났다.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2.
겨우 집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영적 아버지에게 연락이 와서, 몸이 좋지 않아 집에 누워있다고 말씀드렸다. 불을 끄고 방에 홀로 누워있는데, 바깥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서 저녁 먹을 때가 된 걸 알았다. 든든하게 먹어야 기운을 차리건만, 일어나 밥을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명신 형제.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옷 따뜻하게 입고 잠깐 집 앞으로 나올래요?”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갔다. 영적 아버지는 나를 납치하듯 차에 태우고는 장어구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장어구이와 장어탕을 주문해 주셨다. 그리고 아플수록 든든히 잘 먹어야 한다며, 집게와 가위를 들고 장어를 손수 구워주셨다.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걸, 내 밥에 얹어주셨다.
3.
몸에 좋다는 장어를 먹어서였을까? 아니면 사랑을 먹어서였을까?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았다. 내게 아낌없이 비싼 장어를 사 주셨을 때, 나의 영적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때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적자가 계속되면서 오늘내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잘 나갈 때 환대와 호의를 베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게 쉽지 않다. 내 삶에 닥친 문제가 시야를 잔뜩 좁혀놓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악의 상황에서 물질과 시간과 수고로 내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후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고맙고 또 죄송한 마음이 교차했다. ‘내가 뭐라고....’ 여담이지만, 그분은 내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대학원 입시를 준비할 때도, 왕왕 보신탕으로 몸보신을 시켜주셨다. “명신 형제. 공부도 체력이 좋아야 할 수 있어요.” 살면서 ‘내 것’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야곱처럼 움켜쥐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보내주셔서, 차가운 내 영혼에 온기를 잔뜩 불어넣어 주셨다. 환대를 받아본 사람이 환대를 좀 더 베풀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공식은 아니다. 환대받았는데도 입을 싹 닦는 사람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풀었다면, 그건 지난날 환대받은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4.
목회하다 보니, 장례 집례를 자주 하게 된다. 세상이 좁기도 하지. 하루는 발인해서 화장하러 벽제에 있는 승화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처음 사역했던 교회의 성도들을 만났다. 각자 장례 중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을 뒤로 하고,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장례를 마치고,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 쉬고 있었다. 그런데 낮에 화장장에서 만난 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목사님. 오랜만에 다시 뵈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제가 아플 때, 목사님께서 전복죽을 집 앞에 놓고 가신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5.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른 사람과 헷갈렸나 싶었다. 하지만 찬찬히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날의 기억이 복구되었다. 나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분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분에게 받은 사랑에 비하면, 내가 베푼 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내가 그분에게 환대를 베풀 수 있었던 건, 내 본래 성정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도 누군가를 환대한다면, 그건 내 성정과 성품과 체질에 합당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천사들을 통해 받았던 환대를 돌려주고 있는 것뿐이다. 오늘날 내가 조금이나마 사람 구실을 하거나 내게서 온기가 느껴진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환대받았던 걸로 글을 쓰니, 다시 마음에 온기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