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은 인생에서 버릴 게 없어요. 다 글이 됩니다.” 이 말보다 더 인생을 잘 살고 싶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끈기의 말들 / 강민선-
글을 쓰는 작가에게 최고의 찬사는 무엇일까?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글을 예뻐해 주는 독자를 만나는 일이다. 이 땅의 엄마들은 출산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없던 존재가 내게서 태어났다는 건, 생각만 해도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을 쓰는 작가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쉽게 쉽게 글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대개는 고생 끝에 씨름한 글을 내놓는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삶을 오픈해서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재주에 앞서 용기를 더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 글이 이 세상에 없던 책으로 나올 때면, 작가들도 일종의 ‘출간의 기쁨’을 맛본다. 문제는 고생한 만큼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특히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비난을 퍼붓는 사람을 보면 한동안 ‘의욕 감퇴’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내 글에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워 삭제하고픈 순간이 있다. 영상을 편집하듯, 싹둑 잘라 좋은 순간들만 이어 붙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비결은 하나다. 그 순간을 다시 바라보면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꺼내 놓고 싶은 자랑스러운 순간으로만 글을 쓸 순 없다. 만약 그렇게 글을 쓴다면, 빈약하고 빈곤해질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드라이해진다. 때론 ‘부정하고 싶은 순간, 지우고 싶은 순간, 창피한 순간’처럼, 조용히 묻어두고 싶은 순간들로도 글을 써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 할 때 하나같이 용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순간을 꺼내서 글을 쓰는 건, 마치 햇빛 좋은 날에 이불을 너는 일과 비슷하다. 꺼내 놓으면 눅눅하고 칙칙했던 지난날들이 점점 뽀송뽀송해지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독자들이 따뜻함을 느끼는 지점도,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버리고 싶은 순간마저 글로 다듬어 쓰고 나면, 그제야 ‘내 인생도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소중한 인생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걸 알고 인정해 줄 때, 작가들은 감동을 먹는다. 그리고 더 좋은 글로 보답하려는 의욕으로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