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지리산이 가장 아름답고 좋다.(3)

2026년 2월 26일 목요일

by 지우진

눈(雪)은 대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얼어붙어 눈송이가 되고, 지표 기온(육지의 온도)이 충분히 낮을 때 지상으로 떨어지는 현상이다. "지상의 기온이 충분히 낮다"는 말이 꼭 영하의 기온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상의 기온이어도 눈이 내릴 수 있다. 그럴 때는 상층의 온도가 영하이어야 한다. 상층이 영하이고 지면의 기온이 영상 2~4도 안팎이면 눈이 올 수 있다.




둘째 날(1월 10일 토요일)의 아침 기온은 영하 2도였다. 전날 오후에 도착했을 때의 기온은 영상 5도였다. 영하 2도지만 체감온도는 적어도 영하 10도는 되는 것 같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따가울 정도였다. 부산에서는 느끼지 못한 따가움이었다. '이 정도로 추워야 겨울이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집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왔다는 게 물씬 느껴져서 제대로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더위보다는 추위가 더 좋은 나에게 지리산의 여름은 부산보다 시원해서 좋았고, 겨울인 지금은 부산보다 훨씬 더 추워서 좋았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날씨는 화창했다. 햇빛이 아주 쨍쨍했다. 뒤이어 일어난 아이들은 눈뜨자마자 바깥 날씨를 확인하고는 실망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오늘도 눈이 안 와?"라고 물었다. 나는 "오후 3시부터 흐려진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달랬다.


우리들은 간단히 늦은 아침을 먹고 이곳에 오면 늘 가는 근처 카페로 갔다. 여기 달궁마을에서 발견한 뜻밖의 선물과 같은 곳이다. 커피를 좋아해서 9개월 동안 커피에 관해 집중적으로 배운 나에게는, 언젠가 여기와 같은 카페를 열고 싶다는 열망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여름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페 전체를 대관한 것처럼 쓸 수 있었고,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밖은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반면, 내부는 온기가 가득해서 패딩을 벗고 있어야 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샹송을 들으며 고소한 커피 향을 한가득 들이마시니, 유럽 고즈넉한 동네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 온 것 같았다.


커피를 한껏 즐기고, 우리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갔다. 어제 미처 사지 못한 식품들을 사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데, 드디어 하늘에 구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구름 뒤로 해가 쉬러 가고, 짙은 회색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넘었다.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해 보니, 4시부터 눈이 내린다고 되어 있었다. 기온은 영상 5도였다. 숙소로 가면서 아이들에게 곧 눈이 올 수도 있으니 창밖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잔뜩 들뜬 채 바깥을 살폈다. 구름은 점점 어두워졌다. 언제라도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조건이 갖춰졌다.


숙소에 도착해서 장 본 걸 정리한 뒤, 우리들은 방한화로 갈아 신고 전날 내려갔던 계곡으로 갔다. 눈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꽁꽁 얼어붙은 계곡에서 놀고 싶어 했다. 얼음을 깨고 조각하며 놀았던 전날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 뭔가 하얀 먼지 같은 게 바람을 타고 날리는 게 보였다.


'눈이다!'

크게 외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주변을 살폈다. 아내와 아이들은 얼음을 깨느라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좀 더 많이 내릴 때,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고개만 돌려도 눈이 오는 줄 알 정도로 내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혹시나 눈이라고 외쳤다가 금방 그치기라도 한다면, 그때 아이들이 느낄 실망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눈을 보기 위해 이번 여행을 기획했고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달래며 기다려왔는데, 여기서 성급하게 알렸다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짙어진 하늘도, 공기에서 느껴지는 온도와 습도도 함박눈이 내리기에는 완벽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기다리면 더 올 줄 알았던, 흩날리던 눈발이 그새 멎었다. '설레발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라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금방 그치다니, 아쉬웠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3시 50분이 다 되었다. 아이들은 계곡에서 매우 신나게 놀아서 그런지 눈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아침을 먹어서 점심을 먹지 않은 만큼 저녁을 일찍 먹기로 했다. 사장님께 숯불을 요청하고 우리 방에서 공용 바베큐장으로 가져갈 먹거리를 챙기던 중, 밖에 있던 아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다!"

방에 들어와서 몸을 녹이던 아이들은 패딩도 입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부리나케 나갔다. 아까 계곡에서 흩날리던 눈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진짜" 눈이 내리고 있었다.

20260110_해가 지기 전 눈이 오기 시작.jpg 아내의 외침 이후 금세 쌓인 눈.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집중해서 봐야 겨우 알 수 있었던, 하얀 먼지처럼 내렸던 눈은 잠깐 멎은 동안 가득 충전을 했는지 함박눈이 되어 쏟아졌다. 아이들은 다시 들어와서 완전 무장을 한 뒤 환호성을 지르며 마당으로 나갔다. 아직 바닥에 쌓이지 않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직접 눈이 내리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신나 보였다. 새가 날개를 펄럭이듯 양팔을 휘두르며 뛰어다녔다. 아들은 썼던 모자를 벗었다가 금세 젖는 걸 보고 당황해서 다시 썼다. 눈을 맞아 본 적이 없으니, 비처럼 눈도 맞고 있으면 젖는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공용 바베큐장으로 음식을 옮기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 "아빠! 눈도 맞고 있으니까 머리가 축축해져! 아빠도 조심해!"라며,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말하는 아들이 귀여웠다.

20260110_165356.jpg 내리는 눈에 강아지 마냥 신이 나서 뛰고 있는 우리 아들. 사장님네 아들도 같이 나와서 우리 아이들과 눈을 맞으며 놀았다.

바베큐장에 숯불과 음식 준비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으러 오라고 불렀지만, 아이들은 눈 위에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나였어도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기다리던, 생애 처음으로 눈을 봤는데 어제도 먹었던 고기랑 밥이 대수겠는가.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동안 아내와 나는 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신 특식을 먹었다. 사실 이 음식은 부산에서 온 우리가 준비했어야 했다. 바닷가와 더 어울리는데 산속 깊숙한 이곳에서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로 석화찜이었다. 시장에 가서 특별히 사 오셨단다.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고, 실내에서는 타닥타닥 타는 장작이 선사하는 난로의 온기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니, 이만한 호사가 또 있으랴.

20260110_165225.jpg 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신 특식, 석화찜.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며 먹으니 더 맛있었다.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틈틈이 고기를 먹이는 동안, 눈은 소복이 쌓여갔다. 바람도 거세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보통 이 정도면 실내로 들어가야 했지만, 우리들은 한없이 내리는 눈을 놓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을 기획할 때 세웠던 모든 계획이 톱니가 맞춰지듯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 아래에서 나와 아이들은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사장님께서 빌려주신 썰매도 탔다. 아이들은 코와 볼이 빨개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놀다가 지칠 때쯤 테라스에서 먹은 라면은 우리 아들이 선정한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20260110_눈보라.jpg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눈보라가 반갑게 느껴지다니.
20260110_눈보라2.jpg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쏟아졌다.
20260110_가로등 밑 눈보라2.jpg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건 군 복무 시절 강원도에서 본 이후로 오랜만이다.
20260110_210144.jpg 아무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은 새하얀 눈밭을 처음 걸을 때 들리는 뽀드득 소리보다 더 좋은 ASMR은 없다.




보통 여행을 가면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잘 없다. 언제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변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을 때 오히려 새롭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변수가 없기를 바랐다. 계획대로 이루어지길 원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바람대로 되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일기예보의 공(功)이 가장 크다. 예보가 어긋났다면 눈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기예보가 '예보'한 대로 딱 들어맞은 덕분에 눈(雪)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원 없이 봤다. 지리산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2025년 봄부터 2026년 1월까지 지리산의 사계절을 모두 보고 느꼈다. 해가 내리쬐는, 하지만 시원했던 한여름도 경험했고, 계곡물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춥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도 겪었다. 계절에 따라 지리산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지리산의 존재 자체다. 달궁마을을 둘러싼 지리산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끌어안아 주듯 푸근하면서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다. 나처럼 외지인에게 지리산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에게는 동반자다.


등산의 개념도 다르다. 산을 오르는 행위가 자연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오른다. 특히 겨울 지리산은 관상용이 아니라, 다양한 버섯을 키우는 터전이자 고로쇠 수액이 나오는 원천이다. 일반적인 등산로가 아닌, 진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있거나 가파른 암벽을 오르고 나서야 도달할 수 있다. 그저 다 같은 나무처럼 보여도 일상으로 다져진 현지인은 흑과 백을 구분하듯 고로쇠나무를 알아본다. 고로쇠나무를 관리하기 위해 한번 가면 10시간은 산을 탄다. 나의 손길이 닿으며 관리를 해야 이번 겨울에도 지리산이 주는 만큼 얻어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겨울 지리산은 적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엔 삶이 가득하다. 그래서 겨울 지리산이 가장 아름답고 좋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다가오지만, 벌써 겨울 지리산이 그립고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