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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안 Sep 09. 2021

내 영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서호주 워킹홀리데이

나의 영어 이야기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면서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미국 대학원 합격 메일을 받았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조심스레 합격 소식을 알렸다. 두 분은 너무 축하한다며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면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집안 사정을 조심스레 이야기하셨다. "안타깝지만 지금 유학 자금을 도와줄 형편이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6년 동안 유학이라는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았던 불쌍한 나의 청춘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흘러갔다. 함께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던 친구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대학원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너 혹시 워킹홀리데이라고 알아?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워킹홀리데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는 정부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라는데 ~",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바로 노트북을 켜고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장 빠르게 받을 수 있는 나라는 호주. 최저임금이 가장 비싸고, 아시안이 적게 거주하는 지역은 서호주. 이렇게 단 몇 분 만에 내 인생의 새로운 모험과 출발지가 정해졌다. 비록 이전에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경험도 없었고, 해외에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니,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다.


   

대한민국 인천 국제 공항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 서호주 퍼스 공항


난생처음 구입한 라임색의 허리까지 오는 큰 사이즈의 캐리어를 끌고 서호주 퍼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밖에 어둡고, 깜깜하고, 서늘하고, 축축했던 새벽의 모습과 이국적인 냄새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하고 서호주 퍼스까지  7,795 km를 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이상하게 처음부터 이곳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육군 만기 전역도 했겠다. 미국 대학원에 합격할 만큼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왔겠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부딪혀 보고 싶었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다. 한 집에서 여러 명이 함께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였다. 이 또한 굉장히 낯설었지만, 사실 어둡고, 축축하고, 사방에 거미줄이 쳐져있는 방이 더 낯설었다.


대충 짐을 풀고, 휴대폰과 지갑만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미리 알아둔 크로스핏 체육관을 향해 걸었다. 주위에 건물과 집들이 해외 영화에서만 보았던 모습과 동일했다. 아침 6시였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체육관 내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로 한 명의 거대한 호주 트레이너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트레이너 : G'day mate, can I help you with something?

크리스 : ... What?

트레이너 : You seem new to this place, do you want to join the gym?

크리스 : ... Oh!.. Yeah (알아들었다는 흉내), I want to join! (내가 하고 싶은 말)


호주 트레이너의 강력했던 호주 사투리 악센트는 그동안 배워왔던 내 영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래도 영어권 나라인데... 얼마나 어렵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영어 단어 한 개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영어를 길게 말해도, 영어 문장에서 알고 있는 영어 단어 몇 개만 잘 캐치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데, 알고 있는 영어 단어도 캐치하지 못했다. 그가 사용하는 영어 단어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영어 문장을 하나의 영어 단어처럼 말하는 그의 말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호주 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했던 Southern CrossFit


남들과 똑같이 대한민국에서 20년 넘게 영어를 책으로 주로 영어 자격시험을 위해서만 공부했다. 커트라인을 통과하고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때면, 그저 좋아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커지고 약간의 우월감도 느꼈다. 하지만, 서호주 퍼스 공항에서 가졌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어느 순간 영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상대방과 말이 오고 가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오직 내가 들리는 것만 듣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만이 가능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당장은 영어 실력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소통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행기를 탔다. 앞으로 남은 11개월 동안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굉장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주변에서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매일 혼자였다. 새로운 곳에서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혼자서 짊어지고 풀어가야만 했다.


호주 퍼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는 곧 나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10개월 어학연수를 와서 영어만 배우고, 또 다른 사람들은 1년 워홀을 와서 처음 3~6개월 정도는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후에 다양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 호주 생활에 만족하면 세컨드 비자, 써드 비자, 취업 이민을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다. 각자만의 이유와 계획으로 호주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는 바로 영어 실력을 높이는 것이다.


서호주 퍼스 시티


물론 영어 실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내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 대학원 학비를 버는 것이었다. 3개월 동안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키친에서 접시를 닦고,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고장 난 핸드폰을 수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만의 계획으로 또 다른 곳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가장 힘들지만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직업 : 타일, 단열재, 청소. 언제나 일할 사람이 부족했던 직업 : 레스토랑 웨이터, 키친 핸드, 요리사, 카페 바리스타, 파티시에, 호텔 하우스키핑. 다행히 전공을 살려 자신 있게 즐겼던 직업 : 모바일 수리, 세일즈, 디지털 마케터, 홈페이지 디자이너, 코딩 과외, 영어 과외, 영어 통번역, 크로스핏 코치, 스포츠 영양 코치. 학비를 모으기 위해서 어느 것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 좋은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랭귀지 스쿨에서 공부해야만 영어가 빠르게 늘 거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의 형편에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낯선 땅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처음으로 나만의 계획을 만들어서 실행했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기도 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실수도 많이 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면서 점차 적응이 되고, 요령이 생기고, 노하우가 쌓여갔다. 더욱이 어느 순간부터는 영어가 잘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영어에 원어민들도 내가 생각한 반응들을 보였다. 드디어 말이 오고 가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 CrossFit Assassin 패밀리


영어를 잘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20년 동안 책과 강의로만 영어 공부를 해오면서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언제나 영어 자격시험 점수였다. 단순하게 영어 자격시험 점수가 높으면 영어를 잘하고, 낮으면 영어를 못하고. 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영어에서는 그 기준이 달랐다. 영어로 말하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되는지 안되지가 곧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국내에서 혼자서 영어를 공부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매일매일 꾸준하게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없이 영어 리딩을 하고 리스닝을 하고 스피킹을 하고 라이팅을 연습해도, 막상 해외 카페에서 외국인 손님 주문을 처음 받을 때는 무척 당황스럽다. 이는 책이나 강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부딪혀야 한다. 새로운 곳에서의 낯선 환경 때문에 처음에는 주눅 들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잘 못 듣고, 틀리고, 실수하고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자신에 대한 더 큰 확신과 믿음을 가질 수 있다.  


P.S. 좌충우돌 서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는 곧 연재 시리즈로 만들어 볼게요! COMING SOON, CHEERS!




You can learn more from experience than from books or le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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