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과 질문은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은 이미 아는 지식을 뱉는 행위지만, 질문은 없던 것에 대한 호기심이 발현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능'적인 것에 관심을 뺏길 때 그 흐름(변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을 이탈해서 자신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이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은 자신만의 것으로, 매우 고유하고, 비밀스럽고, 사적인 내면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호기심이 발동할 때, 즉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이 발동할 때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의 저자 최진석 교수는 말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런 사람이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립적 주체들은 대답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질문'을 시작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그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대답이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에 따라 승부가 갈리게 됩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대답을 하는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통로' 혹은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중간 역'으로만 존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때 '주도권'은 '나'가 아닌 '지식'과 '이론'에 있게 됩니다.
대답은 '원래 모습'에 대해 묻는 것이니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주로 과거를 따지는 일에 더 몰두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면, ‘원래 모습’을 중시하다 보니 그것을 강력한 기준으로 사용하여 그 ‘원래 모습’에 맞으면 참으로 간주하고 맞지 않으면 거짓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리게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반면 '질문'은 질문이라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먼저 발동해야만 합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입니다.
최진석 교수는 말합니다.
자신에게만 있는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이것이 질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대답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대답의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을 경계] 해야 한다.
: 기존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이 지식과 정보를 답하는(단순히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호기심을 발동시켜 '질문'을 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문은 기능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을 넘어 본질적인 것(흐름, 의미, 나아갈 방향 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2. 다른 사람의 대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서 [자신만의 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기존에 존재하는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달(대답)하는 것이 아닌 충분한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통찰을 담은 '대답'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현상의 '기능'적인 것을 넘어 그 현상의 '본질'적인 것을 충분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때 비로소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