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따르면 몸이 반항한다.
시간을 쪼개어가며 바쁘고 알차게 생활한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뒷목 전체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열이 났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일어나 걷기조차 힘들었다. 출산하고 나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전신통증이 있었긴 했지만, 이건 좀 달랐다. 집에서 누워 쉬는 것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나는 남편에게 등원과 병원까지의 부축을 부탁했다.
병원에선 뇌수막염이 의심된다고 했다. 열이 다시 오르면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링거를 맞고 약을 처방받고 남편에게 기대 힘겹게 집에 왔다. 혼자 이불속에 누워 있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뇌수막염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이름의 질병에 대해서 알아 둬야 했다. 만약 뇌수막염이라면 얼마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전염성은 없는지, 그동안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더 겁이 났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 열이 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
바닥에 달라붙을 것 같은 몸을 겨우 이끌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왔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 몇 시간만이라도 누가 아이를 봐주면 좋으련만, 당장 손 벌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보다 내 몸이 아플 때 더 서럽고 힘들다. 아파도 아이 밥은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고, 아이는 엄마 아픈 것 상관없이 먹고 싶고 놀고 싶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아픈 몸으로 등원을 준비하는데 열이 급속도로 올랐다. 몸은 뜨거운데 너무 추워서 이불을 덮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떠는 엄마를 보고 겁먹을까 봐 남편에게 아이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 달라고 했다. 그리곤 정작 나도 생전 처음 찾아온 오한이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덮고 있었다.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에선 각종 검사가 실시됐다. 30분 동안 등에서 뇌척수액을 뽑아내는 검사가 제일 고역이었다. 종일 여러 가지 검사에도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이 아프니 일상이 모두 망가졌다. 당장 식탁이 부실해졌고, 아이는 나와 함께 집에 고립되었다. 심심한 아이도, 아픈 나도 짜증이 늘었고 우리의 관계를 중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도 중단, 운동도 중단,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촘촘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살짝 쾌감을 느낄 때도 있었는데, 몸은 힘들었던 것일까? 내가 몸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일까?
그때서야 진지하게 돌아본 나의 하루 일과는 살인적이었다. 네 시에 일어나 일 시작. 일곱 시부터 아침식사 준비. 아이를 깨우고 먹여서 열 시에 등원을 시키고 다시 일. 강의가 있는 날은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가서 강의를 하고 대개 점심을 거른 채 집에 돌아와 부랴부랴 집을 치우고 짬이 나면 국에 식은 밥 말아 끼니를 때우고 반찬을 한두 가지라도 만들어 놓고 어린이집에 아이 마중. 하원 후엔 아이와 놀이터에 가서 두세 시간 놀고 집에 와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재우기. 이동시간에도 급한 일처리를 하느라 핸드폰을 붙들고 살았고, 그 와중에도 짬짬이 운동을 다녔다. 주말에는 세 식구 함께 나들이라도 가려고 또 바삐 움직였다. 나갔다 오면 밀려있는 집안일을 하느라고 쉴 수가 없었다. 결국 일주일 내내 숨 가빴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고도 충분한 느낌이 들질 않았다. 몇 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한동안 떠나 있었던 코칭업계는 많이 변해 있었고, 사람들도 싹 다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시 내 길을 개척해야 했다. 잃어버린 감을 되찾아야 했다. 아이가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시간 안에 그걸 다 해내려니 자꾸 초조해졌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우리가 몸을 소중히 여기고 몸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귀담아들을 때 우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게 된다.
- 크리스티안 노스럽,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질병은, 채찍질 그만하고 좀 쉬라는 몸의 메시지였다. 나는 만사를 제치고 쉬어야 했다. 쉬면서야 비로소 얼마나 쉬지 않았던가를 알았다. 몸은 ‘더 이상 재촉하지 마’, ‘쫓아가기 너무 힘들어’, ‘힘들어. 쉬고 싶어’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육아도 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일을 중단해야 했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집안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청소나 설거지는 계속되어야 했다. 아침저녁을 계속 계란 프라이와 김으로 때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맡기긴 어려웠다. 회사일 바쁘고, 살림에 서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픈 나와 바쁜 남편을 쥐어짜는 걸로는 길게 갈 수 없다 생각되었다. 나는 외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다.
- 르네 틔뤼도, <힐링맘>
나는 궁리 끝에 주 1회 한 나절 도우미를 모셨다. 전문 도우미는 속도도 빠르고 솜씨도 좋았다. 도우미가 다녀가고 나면 반찬이 너 다섯 가지 생겼고, 집이 깨끗해졌다. 주 5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해보니 좋은 걸, 해보기 전엔 몰랐다. 아직 수입도 일정하지 않은데 추가 지출을, 그것도 남편 월급으로 쓴다는 게 내키지가 않았고, 좀만 부지런 떨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내 체력으론, 내 욕심으론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어느새 치달아버린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주제로 코칭도 하던 나였지만, 정작 내 생활의 균형은 깨져 있었다. 일을 하면 아이에게 치우쳐 있던 내 생활의 균형을 다시 살려줄 줄 알았다. 아이와 나 사이의 균형은 맞춰졌지만, 일과 생활의 균형 즉 의무와 자유의 균형 그리고 노동과 휴식의 균형은 아직이었다.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여유롭고 느긋한 휴식의 시간, 그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을 몸의 반란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몸의 아우성 덕분에 살림의 일부를 외주를 주고, 휴식과 자유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도우미를 쓰기 시작하면서 급한불은 껐지만, 몸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아팠다. 일이 지속되지 못했다. 마음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은데, 현실은 꽉 막힌 도로 위에 서다 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애 키우며 일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왜 이렇게 내 몸은 협조를 안 해주는 거야! 뭐만 하려고 하면 건강 때문에 발목 잡힌다며 몸을 원망했다.
이유를 찾으려고 가까운 내과부터 큰 병원까지 병원 순례를 했다. 그러나 몸 어디에서도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모호한 대답만 했다. 원인을 찾아야 치료를 할 텐데, 답답한 상태로 몇 달이 흘렀다. 병원에서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내 생활 반경 어딘가에서 찾아야지 싶었다. 집이 너무 습해서 그런가? 내 식습관이 문제인가? 햇빛을 적게 보는 것 때문인가? 비타민이나 무기질이 부족한 건가? 여성호르몬 문제인가?
그 해 겨울 나는 한 달을 거의 누워 있었다. 아이한테도 “엄마가 아파서 못해줘”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라 한 시간이면 돌아오는 아이와 추워서 나가지도 못한 채 아픈 몸으로 집에서 지냈다. 도우미가 주 2회 왔지만 몸은 점점 안 좋아졌다. 면역력이 낮아진 탓인지 드물게 감기까지 걸렸다. 더 이상 혼자 버틸 수 없었다. 친정엄마가 멀리서 소환되었다. 나의 반쪽인 몸에 대해서 원망과 돌봄 사이를 방황한 어정쩡한 몇 달, 내 육아 역사상 가장 우울한 겨울이었다.
by 지혜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