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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Mar 31. 2017

12. 몸과의 대화

자기 몸을 아끼는 엄마가 아이도 길게 사랑할 수 있다.

더 이상 병원에 의지할 수 없었다.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사는 섬세하고 따뜻했지만 느렸다. 두 달 가까이를 다녀도 변화가 없었다. 기운이 조금 났을 때 나는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몇 년 전 인연을 맺었던 가정의학과 의사 선생님의 글을 신문 칼럼에서 보게 되었다.


서양의학을 전공했지만 개량한복에 명상과 요가를 가르치고 다녔던 선생님이었다. 가정의학과 의사로 진료하면서 서양의학의 한계를 알게 되어, 환자 스스로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병을 이겨내는 치유력을 갖도록 하는 것을 연구해 오신 분이었다. 기사에선 그가 자체 개발한 해독식단을 몇 년간 운영 중이라고 했다. 당장 선생님께 연락을 취하고 병원을 찾았다. 피검사 결과는 며칠 걸리는데, 병명이 뭐든 간에 해법은 같다며 해독식단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식단은 간단했다. 밥은 현미밥으로 점심 한 끼에만 먹고, 아침저녁은 해독주스와 고구마, 그리고 견과류를 먹도록 되어 있었다. 계란 등의 유제품, 닭고기를 제외한 육고기, 조개류, 고춧가루 등이 금지식품이었다. 저녁식사와 아침식사 사이에 12시간 공복 유지, 하루 2리터 물 섭취가 부가적인 규칙이었다. 3주간 실천해 보라고 하셨다. 뭔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이것이 이 긴 몸과의 투쟁을 끝내줄 거라는 희망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당장 해독주스 제조에 필요한 야채들을 주문했고, 함께 할 동지들을 모았다. 10여 명의 엄마들과 함께 해독식단에 돌입했다. 


약 1년간 건강을 위해 싸워온 나에게 해독식단을 실천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만큼 절실했다. 그 긴 무기력감, 아픈 원인을 모르는 답답함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내 것을 따로 준비하는 것이 번거롭긴 했지만,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나의 건강을 되돌려 줄 것이라는 희망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3주간의 해독식단이 끝났을 무렵, 나는 놀랍게도 기운을 많이 되찾았다. 삶에 대한 의욕이 다시금 살아났고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곧장 일을 다시 벌렸다. 무엇이 그렇게 조급했을까. 1년을 쉬든, 3년을 쉬든,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것을. 머리로는 분명히 알면서도, 다시 나는 쫓기듯 일을 벌였다. 몸은 다시 신호를 보냈다. 


전신통증과 무기력감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래서 계획대로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바깥에서 답을 찾는 것을 멈추고 내 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결책에 급급하기보다 귀를 열고 몸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몸의 관찰 그리고 기록을 시작했다. 노트에 매일 수면시간, 식사량과 종류, 운동 여부와 몸 컨디션을 기록했다. 약 1달간의 기록 끝에 나는 저녁 식사량이 다음날 컨디션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섯 시 반 경 식사를 하고 9시경 잠자리에 드는데, 속이 더부룩한 상태의 취침은 다음날 곧장 아픈 몸으로 연결되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는 저녁식사 줄이기가 되었다. 양 줄이기, 야채 위주로 먹기, 아예 안 먹기 등 다양한 시도 끝에, 고기를 뺀 가벼운 식사를 이른 저녁에 먹으면 괜찮다는 것을 발견했다. 밤사이 위장이 쉬어야 했던 것이다. 


몸을 소홀히 하고, 몸이 아파도 겉에 증상 치료에 급급한 것은, 단순히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몸에 대한 학대는 오래되었다. 스스로 몸에 붙여 둔 딱지들을 꺼내 보자. ‘비실비실한 몸’, ‘살이 덕지덕지 붙은 몸’, ‘다리가 너무 짧아’, ‘처진 엉덩이’, ‘피부가 너무 거칠어’ 등 좋은 소리가 별로 없다. 목욕하고서 아이가 감기 걸릴까 봐 옷 입히려고 한다는 말이 “아휴 부끄러워. 빨리 옷 입자” 이다. 의도와 달리 몸에 대한 수치심을 유발한다. 엄마 아빠 앞인데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다고.


과음, 잦은 외식, 인스턴트 음식, 쉬지 않는 다이어트, 과식과 야식, 운동 안 하는 것 모두 뻔히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적당히 어울리려는 이유로 지금껏 몸을 괴롭혀온 방식이다. 출산 전에는 건강관리에 소홀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건강이 담보되지 않고 일상유지가 어렵고, 관계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몸의 소리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나는 이제 잠시 멈추어 쉬는 것에 관대해졌다. 어깨가 결릴 때는 누구에게라도 어깨 좀 주물러 달라고 하고 아이를 들다가 팔이 아프면 “엄마 팔이 아프네. 안아만 줄게”라고 한다. 몸이 피곤할 땐 산더미 같은 설거지도 내일로 미룬다. 문서작업을 하다가도 졸리면 잠깐 눈을 붙인다. 시간이 나서 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쉰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풀장에 가서 노는 게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50분 논 뒤엔 10분 쉬도록 되어 있다. 일의 생산성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8시간 근무에는 1시간의 휴식이 법으로 의무화되어 있다. 아니 생산성이 중요하기에 1시간의 휴식이 의무로 지정되어 있다. 육아와 살림도 엄연한 ‘일’이다. 에너지의 투입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마가 쉬는 것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자, 잃어버린 에너지에 대한 충전이다. 


휴식보다 바쁨이 미덕인 사회, 여성이 자기 욕구를 채우는 것이 이기적이라 욕먹는 사회, 그 사회 속에서 엄마 개인이 휴식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란 사치에 가깝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다 보니, 주변에 ‘쉼’에 대한 모델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지치면 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아플 때까지 자신을 혹사시키고, 성치 않은 몸으로도 책임을 ‘해내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라고,‘좀 쉬어도 돼’라고 배려받기를 원한다. 


“월경을 하기 전 여성에게는 혼자 지내고, 휴식을 취하고, 일상적인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여성들이 매달 3~4일 동안만이라도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을 수 있다면, 월경 전 증후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크리스티안 노스럽,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비행기에서 응급상황 발생 시 산소마스크는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착용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살아야 아이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남에게 맞추기만 해서는 몸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몸은 적당한 수면과 영양섭취, 적당한 운동과 이완을 요한다. 환경이 녹록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의 배려와 지지가 없더라도, 몸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자기돌봄은 기본적으로 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도움받을 줄 아는 사람이 기꺼이 줄 줄도 안다. 그러니 이기적이라는 소리 들을까 봐 겁먹지 말자. 타인에게 폐 끼치는 걸 두려워 말자.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아이도 사랑할 수 있다.


by 지혜코치


해독기간 중엔 점심을 이렇게 정성껏, 거하게 차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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