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만나곤, 내 안의 아이와도 만난다.
잠자던 아이가 갑자기 흐느껴 운다. "엄마..."하며 울먹거리는 소리에 신속하게 아이를 도닥인다. 뭔가 무서운 꿈을 꾼 걸까. 아이는 금세 진정이 되고 새근거린다. 아이의 울먹임은 갑자기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기억나지 않지만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아주아주 어린 시절로 잠깐 돌아가 본다.
나도 저렇게 엄마를 불렀던 때가 있었겠지. 간절한 목소리로, 애타는 목소리로. 나 좀 봐달라고 나 좀 도와달라고, 나 지금 무섭다고 외친 적이 있었겠지. 그때 네 아이 독박 육아로 바쁘고 지친 그래서 무심한 우리 엄마는 어떻게 반응해 주었을까. 실제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어슴프레 짐작은 간다. 물론 어른이 된 나는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 안의 아이는 아닌가 보다. 불러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난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부르다가 부르기를 멈췄겠지. 그렇게 서서히 사람과 세상에게서 마음을 거두었겠지. 나를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처절한 외로움을 마주할 때가 있다. 무서움에 떨고 있는 작은 아이, 떨다 떨다 부르기를 멈춰 버린 그 아이가 보일 때가 있다. 그 아이에게 말을 건다.
"많이 무서웠구나"
"무서워해도 괜찮아"
"누군가 봐주길 기다렸구나"
"많이 기다렸지?"
"이제 내가 옆에 있어줄게"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따뜻하게 안아줄게"
"네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해도 괜찮아"
"누군가 손가락질해도, 그래도 괜찮아"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그 말을 들은 내 안의 아이는 조용히 흐느낀다. 그러다 울음이 터져 나온다. 얼마나 마음껏 울고 싶었을까. 얼마나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을까. 자신이 '존재'해도 괜찮다는 걸 얼마나 확인받고 싶었을까. 그 아이는 한참을 울고서야 살짝 미소 짓는다. 그 눈물도 미소도 참으로 아름답다. 아이의 울먹거림에 잠이 깬 나는 그렇게 아이가 되었다 내가 되었다, 울었다 웃었다, 새벽을 맞이한다.
그렇게 문득 튀어나온 내 안의 아이와의 대화가 내겐 참 뜻깊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시기는 참 특별하다. 아이에게서 전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 인내심이나 이해심, 순발력과 문제 해결 능력 등 여러 가지 능력이 키워진다는 점, 삶의 방향성과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와의 시간은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릴 때 어땠을까? 호기심을 갖게도 되고, 나를 대했던 엄마의 모습을 다시 나에게서 발견하게도 된다. 그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상처가 문득 드러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구질구질한 내 인생’이 지겨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표현예술치료 상담을 하시는 그 선생님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의 완전한 안전지대였다. 그러나 그녀는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언어는 무의식으로의 진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신 내 몸의 감각을 물었다.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몸을 움직이고 몸의 어디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말로 표현하게 했다. 몸은 기억의 저장창고라고 했던가. 몸의 감각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곳곳에 숨어 있던 슬픔과 두려움과 마주했다. 처음엔 스며 나오는 감정들이 낯설어 꾹 참았다. 감정을 참으면 몸이 긴장한다.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감정을 참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내 목을 놓아 울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어른 말 잘 듣던 모범적인 아이의 탈을 벗어던지고, 엄마한테 바비 인형 하나만 제발 사달라고 애원하던 7살 아이처럼 울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납득도 안 되었지만,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나는 허락해 주었다. 울고 나면 개운해졌다. 말할 수 없이 후련했다. 두려움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더 용기가 생겼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세상이 반짝거렸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도.
인간의 핵심 요소를 즉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면의 아이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다.
- 존 브래드쇼, <상처받은 내면 아이 치유>
내 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보아주지 않았을 때는 침묵하더니, 이제 관심을 가져 주니 때때로 튀어나와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그냥 들어준다. 언제나 그렇듯 “그랬구나”, “그럴 수 있었겠다”가 최고의 공감이다. 들어주는 귀가 있으면 아이는 더 쏟아내는 법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듣는다. 그럼 진짜 속마음이 나온다.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낸 아이는 드디어 스스로 잠잠해진다.
by 지혜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