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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dovico Aug 20. 2024

사라지는 우리의 장소들

② 광장 이해하기

캐쥬얼한 복장에 한 손에는 수첩을 들고 있다. 비교적 나이가 있는 남성이 주문 후 음료를 받아온다. 그리고서는 “김부장이…”라고 운을 떼며 대화를 시작한다. 어느새 오전 8시가 넘어 직장인들의 시간이 됐다는 뜻이다. 내 눈치보지 말고 마음껏 대화하라고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저 나만의 배려방식이다. 이 곳은 집 근처 아침 7시면 문을 여는 커피숍인데, 늘 사람이 적다보니 긴밀한 대화를 원하는 직장인들의 방문이 잦은 편이다. 특히 오전 8시부터 9시까지는 직장에서의 곤란함을 나누는 광장이 된다. 

카페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대부분 표정이 저리 밝지는 않았다(자료 : LOVEpik)

물론 그들의 모든 대화가 다 들리는것도 아니고, 일부러 들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표정과 제스처, 목소리의 톤과 단어 등을 조합해보면, 회사에서의 여러가지 문제를 대화하는 경우임을 유추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누기가 곤란하고, 그렇다고 멀리나가기는 어렵지만, 가까운곳에 위치한 이 카페는 최적의 소통공간이다. 이렇게 한적하고 넓은 공간이 주는 여유가 저들의 소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들에게 카페가 없었으면 어쩌나 싶다.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도록 촉진하다보면, 늘 현실의 한계가 있어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는 늘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서 지역이나 조직 등의 이야기를 대내외적으로 나누는 광장이 일상 안에서, 더욱 희박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일상의 어떤 경험은 서로 만남으로써, 발산되고 부딪히며 증명되거나 소멸하거나 개선되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계기를 줄텐데, 지금의 상황은 그 만남 자체를 불발하게하는 기조가 있는 것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만남은 집안에서의 가족간 만남, 서로 알고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뤄진 식당이나 커피숍과 같은 공간, 회사나 학교 등과 같은 공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형성하는 경험 자체가 적어졌다. 인간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만나는 경우보다는, 어쨋든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이해와 공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더 다양한 사람들과 나누는 잡담은 타인에 대한 수용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가 긍정적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라스트미션은 기본 서사는 가족과 연결되지만, 나는 노년의 감독이 미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조금 다르게 읽었다. ‘지금 미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광장이야. 우리는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어가야해. 그리고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며 가지고 있는 편견을 늘 살펴야해!’ 물론 나의 뇌피셜이다. 감독은 주인공으로 연기하는데, 살고있는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마약을 옮기며 얻는 소득(!)으로 이 장소를 후원하여 사람들의 만남을 이어가게 한다. 또 미국의 넓은 지역을 운전하며 만나는  레즈비언, 흑인, 남미이주민 등과 대화를 하며 자신이 과거에서부터 가져왔던 편견 등을 고쳐가는 장면들이 나온다. 

영화의 한 장면, 마약상들로부터 감시를 받는 모습이다. 얼 스톤(주인공)을 거칠게 감시하던 마약상들이 그를 겪고 인간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오해와 편견은 인지에 자리잡고 대체로 현실에서 확인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만나는건 오감과 감정이고 현실적 경험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대화라고 해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기존의 관념은 더 쉽게 수정될 수 있다.




나는 우리 동네의 ‘진골’이다. 사실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곤한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고 초중고를 다닌 뒤, 결혼 뒤에도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다. 
우리 부모님이 1983년 즈음 동네에 터를 잡으신 뒤 쭉 지금까지 살아오셨는데, 위로 두명의 누나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거주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아내의 가족들도 같은 동네에 살았었고, 장인어른께서는 나의 초등학교 대선배다. 해병대는 몇 기냐고 묻지만, 우리는 몇 회냐고 묻는다. 
오래 살아온만큼 동네의 변화과정을 상당부분 꿰고있다. 우리동네는 거주단지 인근에 디지털단지가 있어서 크게 재개발되었다. 작은 집들이 붙어있고 골목길이 여기저기 많았던 곳에서 빌라단지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1960년대 39.7%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의 도시지역거주 비율은 2022년 기준 91.4%가 되었다. 당연히 도시에는 새로운 장소가 조성되며 건물이 세워졌고 그 사이에는 골목이 들어섰다. 농촌에서의 공동체, 마을, 함께하는 소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이주민들에게 골목은 공공장소였다. 골목길은 사람들에게 커뮤니티의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골목이 바로 광장이었다. 공공재였던 골목에서 서로가 만나 나누던 이야기는 곧 동네의 의제가 다뤄지던 공론장이었다.

이런 풍경은 1990년대 우리 동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자료 : 골목안 풍경 전집; 김기찬)

 건축가 유현준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때 한두 시쯤 하교해서 집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집 앞 골목길에 나와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시장 어귀부터 돌을 차면서 걸어오다가 우리 집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할머니와 일하는 누나가 대문 앞 길가에 앉아서 앞집 할머니와 햇볕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은 행복한 느낌으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이렇듯이 앞집 사람하고 담소를 나누는 골목길은 공동의 거실이었다. 각자 집 안에 마당이 있고 대문을 열고 나가면 골목이 거실이었던 것이다…이렇게 동네 사람들의 거실로, 때로는 아이들의 축구장, 야구장, 배드민턴장으로 사용되던 골목길은 마이카(my car) 시대가 오면서 막을 내렸다.”
골목길, 운동장, 놀이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장소였다. 특히 아이들은 그곳에서 뛰노는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상식은 사라졌다. 학교 운동장이나 몇몇 거주단지의 놀이터는 모두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내 쌍둥이 조카들은 축구를 돈을내고 배운다. 우리 때는 공가진 친구 한명만 있으면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즐겁게 놀았었는데, 그걸 돈을주고 경험한다. 놀이터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4년 새 전국의 공공 놀이터 면적은 132만 ㎡가 줄었다. 축구장 188개 크기이며, 어린이 한 명당 공공 놀이터 면적은 4.94㎡, 1.5평이 채 안된다. 아이들이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행복한 아이를 키우기 어렵게하는 환경이 더욱 아이들을 사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사라지는 놀이터를 조명한 KBS 뉴스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는 공적공간의 경험이 사라진다고 보는건 무리일까? 
축구교실과 같이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대신하는 민간 서비스를 비롯하여, 넓은 공간을 주차장으로 바꾸는 경우가 잦아진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하려면 소소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 커피숍이 이리도 많은건지 모르겠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집 외에는 머물곳이 점차 사라진다. 마땅한 공공시설이 없으면 휴가나 여가를 위한 시설과 수단이 사적소유와 소비 대상이 된다. 집이나 회사 등 개인적 장소에서 얻을 수 없는 경험을 공적인 장소에서 얻어 보완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도 공공영역에서 보충할 수 있었던 과거는 사라져간다.  


한 때 비교불가의 전세계 부자 1위였던 빌게이츠는 공공도서관 애찬론자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도서관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왔다. 우리는 단지 독서습관에 집중하지만, 빌은 공적인 장소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단을 통해 많은 돈을 공공도서관에 기부했다. 공공 도서관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양질의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지난 파리올림픽에서 스케이트보드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요시자와 코코는 동네 공원에서 주로 보드를 연습했다고 한다. 아무리 맹 연습을 했다해도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1등을 했다는 것은 큰 재능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만약 빌게이츠에게 근처 도서관이 없었다면? 또 요시자와 코코의 집 근처에 늘 연습했던 공원이 없었다면? 아마 그와 그녀의 부모가 부자였다면 사설 공간에서 경험을 이어갔을 것이고, 여유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더불어 그들이 그 공간에서 만났던 많은 관계들 역시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살고있는 자치구는 작은도서관이 잘 되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도서관의 수를 점차 줄이는 정책을 가져가고 있다. 
군 전역 후,  진로 고민이 너무 컸던 내가 주로 머물렀던 곳이 동네 작은도서관이었다. 돈이 없는 내게 여러 질좋은 책들을 탐독하는데 2층 일반자료실과 3층 열람실은 최고의 장소였다.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일본유학을 준비하며 3층 열람실에서 공부했는데, 쉬는시간이면 우리 둘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6개월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서로의 개인사부터 미래에 대한 고민거리나 꿈을 비롯해 사소한 농담거리도 나누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동네 작은 도서관, 한여름이면 담장 식물이 초록으로 도서관을 전부 덮는다

지나고보니 옥상이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나와 친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외에도 옥상에 있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쉬던 여러 동네 주민들이 떠오른다. 비록 근처 학교의 시험기간마다 중학생들이 뛰고 떠들고 어지럽혀서 시끄러울 때는 조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노인, 중장년, 청년, 청소년 등 동네의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지고 만나며 때로는 갈등도 있던 그런 광장이었다. 

비슷했던 시기인 어느날 한 방송에서 경찰의 진입 시도와 불타는 장면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용산참사였다. 당시에 나는 고통받으며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또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용산참사 시국미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지금의 명동성당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성당 언덕 아래 주차공간과 언덕을 올라가는 긴 길이 성당 마당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공간이었다. 명동성당 단순히 종교 건물이나 관광 명소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통해 독재 시기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기도 했었다.  

시국미사가 시작하고 입당성가에 맞춰 입장하는 사제단을 보았다. 신부님들은 제의를 입고 저마다 형형색색의 영대를 메고 성당 마당에 간이로 설치된 제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서 앞선 작은도서관에서의 고민들에 대한 해답으로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여기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으로 광주 카톨릭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수도자가 아니지만 수도회와 신학교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지금의 공익활동가로서의 토대가 되었다. 


개인의 삶은 사회적인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완성된다. 그런데 그런 사회적인 경험을 주던 공간과 장소들이 점점 사라진다. 

명동성당과 그 앞 공간을 공론장으로 만들어주던 광장이〈명동성당 특별계획구역 세부개발계획〉이라는 개발로 사라졌다. 물론 지금이 더 쾌적하고 누리기에 더 즐거운 공간으로 변모한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명동에 갔더니, 코로나 이후에 K컬쳐에 힘입어 전세계에서 찾은 외국인들이 정말 많았고 그들에게 명동성당이 좋은 여행명소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개발이 있기 전 명동성당에서 이뤄진 시국미사 모습(자료 : 한겨레신문)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명동성당이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사회의 이슈,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을 통해 사회적인 타락에 대한 윤리적 기준의 선포,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동체로서의 연대와 지원이 개인적으로는 너무 아쉽다. 그 이후에 있었던 사회적 참사인 세월호 시국미사는 광화문 광장에서 이어졌다. 사례로 카톨릭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나 개신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사회에서 역할을 하는 광장으로서의 공론장 상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동네를 비롯하여 명동성당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점차 우리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광장의 경험이 어떤 논리에 의해서 사라지고 파편화된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버렸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겠다는 슬픈 마음이 든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안타까워하며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공공 도로에서의 상업은 낯선 사람들을 끌어 모아 공공성을 창출하는 1차적 자석이었다. 물론 지금도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구입하기 위해 쇼핑몰에 모여든다. 그러나 쇼핑몰이라는 사유재산 소유자들은 모이는 사람들을 제한한다. 즉 걸인과 노숙인은 들어갈 수 없고, 정치행위는 금지된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토론하려는 시도를 하면 경비원들이 나타나 사태를 정리한다. 상업의 1차 장소인 도시의 거리를 쇼핑몰이 대체하고, 소비주의의 유혹이 시민의 책무를 우습게 만들면서, 낯선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울려온 1차 장소를 빼앗겼다.우리 중 몇 명이 이웃에 사는 사람이나 일터에서 매일 보는 사람을 잘 알고 지내는가? 많은 이가 동료나 이웃들과 너무 드물게 어울리기 때문에 정치체를 강화할 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우리의 다양한 광장들이 주는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갈등이 더욱 커지는 이유는 서로 상대방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편견이 사실이 되어 서로를 대하는게 있는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아직 기대를 놓고있지 않다. 점차 사라져가는 여러 장소들이 변혁을 통해 다시금 일상 곳곳에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를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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